결절점에 다다른 느낌이다. 군불은 땔 만큼 땠다고 판단했는지 이제 밥솥을 올려놓을 태세다.
노무현 대통령은 어제 중앙언론사 논설·해설실장들과의 간담회에서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의 임기를 같아지도록 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라고 말했다. 개헌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다. 한 참석자가 "차라리 내각제 개헌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묻자 노 대통령은 "대답을 피하겠다"고 했다. "정국이 엉뚱한 방향으로 가버리게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면서도 "반대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별 의견이 없다"고만 했다.
노 대통령 입에서 나올 만한 얘기는 다 나왔다. 연정 제안에서 시작한 노 대통령의 어록은 "슈뢰더·고이즈미가 부럽다"와 "양원제가 필요하다"는 말로 반점을 찍더니, "대선과 총선 동시 실시"로 온점을 찍었다. 이로써 선거법 개정 수준에 머물던 노대통령의 발언은 헌법 개정, 즉 최고 수준으로 확대됐다.
그래서일까? 상당수 언론은 오늘자에서 노대통령이 개헌을 구상하는 것 같다고 보도했다. 대통령 중임제 개헌을 점친 언론이 있었지만 상당수 언론의 진단은 내각제 개헌이다.
그뿐이 아니다. 상당수 언론은 내각제 개헌에 이르는 도정에서 빚어질 정치상황을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곁들여 전망하고 있다. 노대통령이 탈당을 선언하고 거국내각을 구성하면서 한나라당에 연정을 수용할 것을 압박하고, 그 후 선거구제를 개편하고 내각제 개헌까지 시도할 것이며 이 시도가 성공하면 대통령직 사임을 발표하면서 새 선거 실시를 주문할 것이라는 그림이다.
결절점에 다다른 것 같다는 진단은 그래서 나온다. '설마'하던 언론이 오늘을 기점으로 내각제 개헌 시나리오까지 제기하고 나선 것은 그 문제가 이제 공론화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뜻한다. 이제 남은 건 노대통령의 한마디다. "맞습니다. 맞고요"가 그것이다.
노 대통령의 '선언'은 필수불가결하다. 노대통령의 입에서 나올만한 얘기는 다 나왔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군불 때기 차원의 말이었다. 자신의 구상을 잘게 쪼개 시차를 두고 파편적으로 제시했을 뿐, 종합 구상을 국민 앞에 공식적으로 제시한 적은 없다. '필생의 과업'을 밝히는 것 치고는 그 형식과 절차가 너무 '비정규적'이었다. 그래서 억측은 구구했고 혼란은 컸다.
그럼 노 대통령이 '권력을 통째로 걸고' 개헌까지 아우르는 지역구도 해소 마스터플랜을 선언할 시점은 언제일까? 그리 멀어보이지는 않는다.
노 대통령 입장에서 보면 대국민선언을 위한 여건이 조성돼 가고 있다. 주요 현안 가운데 하나였던 교육문제는 교육부가 엊그제 논술 가이드라인을 제시함으로써 수습돼 가고 있다. 부동산 문제는 어제 종합대책을 내놓음으로써 일단락 시켰다. 두 사안 모두 논란은 있지만 방향은 잡혔다고 정부는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
북한 핵 문제가 남지만 이 또한 이달 중순 속개되는 6자회담에서 일정한 결실을 맺을 공산이 크기에 그리 우려하지 않는 것 같다.
따라서 노 대통령이 대국민 선언을 감행한다면 그 시기는 베이징에서 타결 소식이 날아온 직후가 될 공산이 크다. 물론 노 대통령의 요즘 기세로 봐선 20여일을 참을 수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상식적인' 전망은 그렇다.
노 대통령이 대국민선언을 하는 순간 상황은 아주 복잡하게 돌아갈 것이다. 언론이 그리고 있는 복잡한 시나리오 때문만은 아니다.
노 대통령이 연정 얘기를 처음 꺼낸 6월 하순 이후 지금까지의 구도는 단순했다. '노대통령 대 한나라당' '노대통령 대 국민'의 단선구도였다. 하지만 노 대통령이 내각제 개헌까지 아우르는 대개편을 선언하는 순간 이 구도는 깨진다.
오매불망 차기 대권을 꿈꾸던 주자들이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본격 대응에 나설 것은 불문가지다. 차기 대권주자들이 본격 대응에 나서는 순간 계파별 각개약진이 시작될 것이고 정국은 당의 틀을 뛰어넘어 계파별 연대와 배척의 난장구도로 빠져들 것이다.
정치권의 난장구도는 '지역구도 해소 대 권력야합'의 대명분이 정면충돌하는 겉모습을 띠겠지만 실상은 열심히 정치적 이득을 헤아리면서 '국민 분할'을 끌어내는 양상으로 전개될 것이다.
이 뿐인가. 잠복했던 주요 민생현안이 정치권의 난장구도 틈새를 비집고 나와 다시 고개를 들 공산도 얼마든지 있다. 너무 빠르게 조성되는 정치권의 사생결단 구도 때문에 국민 또한 이중적인 사생결단 상황에 휘말려 들어갈 수도 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