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하면서 닮아간다고 했다. <조선일보> 오늘자에 실린 '류근일 칼럼'이 그 경우다.
욕하는 자는 언론인 류근일씨다. 욕먹는 사람은 "대통령 노무현씨"다. 욕의 내용은 "두 가지 상반된 병증"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류근일씨는 "그대들은 나의 영광과 보위를 폐기할 수 있다…그러나 나는 여전히 저들 만백성의 왕이다"는 리어왕의 말에서 "두 가지 상반된 병증"을 도출한다. "의기소침과 그에 따른 반발적 허장성세"가 그것이다.
류근일씨는 이어서 "대통령 자리를 내놓겠다고 일종의 정치적 자살 시위를 하면서 대연정, 선거구제 개혁 운운하며 무언가 세상을 또 한 번 뒤흔들 궁리를 하는 역설적 공격성"을 보이는 "대통령 노무현씨"도 같은 증세를 보이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래서 류근일씨가 내놓은 처방은 "노무현식 정치게임에 일일이 대적하기 보다는 '노무현 이후'를 기획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국민통합 구국연합정권 수립이라는 구도로 치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류근일씨가 "욕하면서 닮아간다"는 '욕'을 자초하는 지점은 바로 이곳이다.
노무현 대통령 닮아간 류근일
류근일씨는 "한나라당이 먼저 제로 베이스에서 독식정권 포기 용의를 밝히고, 모든 정파들이 구국연합정권의 대헌장에 합류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한나라당의 박근혜·이명박·손학규씨, 민주당 지도부, 고건씨 등 주요 당사자들의 허심탄회한 역사적 대타협"을 제안한다.
류근일씨의 표현을 그대로 따르자면 류근일씨의 "두 가지 상반된 병증"은 이 구절에 집약돼 있다. 류근일씨가 한나라당을 향해 "제로 베이스에서 독식정권 포기 용의를 밝히라"고 요구하는 이유는 '반한나라 정서' 때문이다. "지금 많은 국민들이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고 해서)… 한나라당을 좋아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는 것이다. "차떼기와 특정지역 헤게모니도 싫다"는 게 국민 정서라는 것이다. 그래서 "분권형 권력구조"에 대한 합의는 필수적이란다.
류근일씨의 이런 진단은 한나라당으로서는 "의기소침"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따라서 한나라당에게 은인자중을 요구해야 할 터인데 류근일씨는 오히려 "반발적 허장성세"를 주문한다. "2007년 대선은 한마디로 '대한민국을 김정일 입맛대로 바꿀 것이냐, 말 것이냐'의 한반도 최후의 결전"이 될 것이니까 "남북 김정일 연합세력"에 맞서 "국민통합 구국연합정권" 수립 구도로 치고 나가라는 것이다.
류근일씨는 "국민통합 구국연합정권"의 방책을 내놓기에 앞서 "남북 김정일 연합세력"의 승부전략부터 짚는다.
"우선 6자회담에 응하는 척 하면서 이 조건 저 조건 시비하며 시간을 질질 끈다. 그러면서 핵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미국을 상대로 그렇게 시간을 버는 사이 남쪽 대응 세력과 공모해 '남반부'를 '민족 공조'의 이름으로 타고 앉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을 '혁명 본사(本社) 평양에 봉사하는 통일전선 계열사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아울러 "친일파 낙인찍기"와 "가진 자 때리기"를 병행하면서 그 여세를 몰아 "반미·민족·민중"의 일대 쓰나미를 일으키겠다는 것이다.
"남북 김정일 연합세력"의 이런 간계에 맞서기 위해 류근일씨가 내놓은 "국민통합 구국연합정권"의 방책은 이런 것이다. "'1948년에 왜 굳이 대한민국을 세웠는가?'의 가장 원초적인 '존재 이유'를 새삼 되살"리고, "어떻게 하면 NL 브랜드 도둑고양이한테 대한민국을 내주지 않을 것인가를" 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민주당과 한나라당마저
그러나 어쩌랴. "국민통합 구국연합정권"의 한 축을 담당해야 할 민주당은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이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승계한 것이라고 이미 도장을 찍은 터이고, 한나라당마저 '전략적 상호주의'를 버리고 '상호 공존정책'으로 대북 정책을 바꾸겠다고 선언하면서 노무현 정부의 대북 전력지원을 용인한 터인데….
그뿐인가. 류근일씨는 "국민통합 구국연합정권"을 이끌어낼 '의병'의 출현을 대망한다고 밝혔지만, "친일파 낙인 찍기"나 땅·집부자 즉 "가진 자"에 대한 세금 때리기를 상당수 국민이 지지하고 있는데….
이렇게 보면 류근일씨의 "국민통합 구국연합정권" 수립전략 가운데 남는 건 분권형 권력구조, 다시 말해 권력 나눠먹기 밖에 없는데, 이 부분에 관한 한 "대통령 노무현씨"가 이미 선수를 쳤다. "권력 나눠먹기" 차원이 아니라 아예 "통째로 줄 수도 있다"고 했고, 차기 권력에 관해서는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았을 뿐 권력 나눠먹기의 최고 형태인 내각제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공공연히 밝혀왔다.
이 정도 짚었으니 이제 마무리하자. 류근일씨의 야심찬 "국민통합 구국연합정권" 수립 전략은 기실 "대통령 노무현씨"가 추진하는 전략의 아류에 불과하다. 지역구도 해소를 대명분으로 내세운 "국민통합 지역연합정권" 수립 전략을, 용공세력 타도를 명분으로 내세운 "국민통합 구국연합정권" 모델로 바꿔놓았을 뿐이다.
29% 지지율의 노무현 대통령이 "국민통합 지역연합정권"을 구상한다고 해서 "두 가지 상반된 병증"을 앓고 있다고 맹비난한 류근일씨 또한 차떼기 한나라당 중심의 "국민통합 구국연합정권"을 주장했다. 욕하면서 닮는다는 말은 그래서 조상 대대로 내려왔나 보다.
아 참. 한 가지 다시금 확인하고 넘어갈 게 있다. 욕하면서 닮아가는 모습 가운데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게 있다. "대통령 노무현씨"나 언론인 류근일씨나 모두 직간접적으로 "분권형 권력구조"를 운위하고 있다. 교차할 수 없는 두 사람이 거의 똑같이 "분권형 권력구조"를 외치는 그 이유, 이것이 류근일씨의 칼럼 텍스트를 읽는 것보다 더 생산적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