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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하자. 우리나라는 상식이 통하는 사회다. 대형사건이 불거지면 제기되는 '상식적인 의구심'이 결국 사실로 밝혀지곤 하는 사회다. 다시 말하면, 제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로 상식의 허를 찌르려 해도 결국 상식의 울타리 안에서 놀더라는 얘기다.

<한겨레>의 오늘 보도는 한국 사회의 상식을 재확인해주는 것이다. 박인회씨가 삼성에 X파일을 보여주며 '거래'를 시도하기 두세 달 전쯤인 99년 7∼8월경에 누군가가 <중앙일보>를 찾아갔다고 한다. 미림팀의 도청 녹취록 수십 개의 목록을 보여주며 수십 억 원에 사라고 제안했다고 한다.

이 목록에는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의 녹취록도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중앙일보>측은 녹취록을 사기 위해 삼성에 자금 지원을 요청했지만 삼성은 "사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고, 그래서 거래는 무산됐다고 한다.

안기부 불법도청 사실이 밝혀졌을 때 대다수 국민은 우려했다. 불법도청의 결과가 음지에서 악용될 가능성을 우려했고, 박인회씨가 삼성과 거래를 시도한 사실이 밝혀지자 그 우려는 더 커졌다. 거래를 시도한 인물이 박인회씨 단 한 명에 그쳤겠느냐는 의구심과 우려가 교차했다. <한겨레>는 이런 의구심과 우려가 상식적인 것임을 다시 확인시켜 준 셈이다.

이학수 본부장과 <중앙일보>는 불법도청물을 미리 봤다?

이런 우려가 전혀 근거없는 것은 아니었다는 게 확인됐으니 좀 더 나아가 몇 가지 상식적인 의구심을 제기해도 될 듯 하다.

<한겨레>의 보도에서 앞뒤 상황이 명료하지 않은 게 있다. <중앙일보>에 녹취록을 사도록 제안한 '누군가'가 단지 녹취록 목록만 보여줬는지, 아니면 녹취록 내용까지 열람하도록 했는지가 명확치 않다. 물론 <한겨레>는 '목록'이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기사 구절은 '내용'까지 보여줬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학수 당시 삼성구조조정본부장이 (박인회 씨가 제시한) 녹취록을 보자마자 "여기 똑 같은 것이 있네"라고 말하고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고 진술한 바 있는데 이학수 본부장이 박씨를 만나기 전에 이미 <중앙일보> 쪽을 통해 이 녹취록을 봤을 가능성이 있다는 게 <한겨레>의 추론이다.

<한겨레>의 이런 추론이 맞다면 이학수 본부장 뿐 아니라 <중앙일보> 관계자도 녹취록 내용을 봤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가 된다. 아울러 이때 본 녹취록 내용을 취재·보도의 단서로 활용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 힘들다는 얘기도 된다.

하지만 <중앙일보>가 그것을 단서로 취재·보도했다는 흔적은 전혀 없다. 뿐만 아니라 X파일이 공개된 후 도청 내용 공개는 절대 안 된다고 주장한 <중앙일보> 논조의 진정성을 믿는다면 그런 행위를 했다고 의심하는 게 결례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치자. 그러나 이 점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중앙일보>는 X파일 공개 후 도청 내용 공개 '불가'와 함께 도청 행위 '근절'을 강력히 촉구한 바 있다. 역시 <중앙일보>의 이런 논조에 진정성이 담겨 있다고 믿는다면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 도출된다.

99년 7∼8월에 '누군가'가 미림팀의 녹취록 목록을 들고 <중앙일보>에 제 발로 찾아왔다. 더구나 '누군가'가 제시한 목록은 하나가 아니라 수십 개였다. 불법 도청이 광범위하게 자행됐음을 명명백백하게 보여주는 실마리다. 언론사로선 취재 거리가 넝쿨째 굴러들어온 셈이요, 사회의 파수꾼으로서 당연히 취재에 착수해야 하는 의무가 부여된 셈이다. 그런데도 <중앙일보>는 그때부터 X파일이 공개될 때까지 미림팀의 불법 도청 행위에 대해 어떠한 기사도 내보내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녹취록 목록에 삼성도 들어있었고, 자사 사주 홍석현씨도 들어있었기 때문인가? 이런 '상식적인' 의구심을 던지는 것으로 일단 갈음하자.

불법 도청물 거래가 '수사 본류에 벗어났다'는 검찰

또 하나, 의아하고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건 검찰 태도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불법 도청물을 매개로 한 '흥정' 사실이 추가 포착됐는데도 검찰은 수사할 뜻이 별로 없다고 한다. "피해자가 없을 뿐 아니라 수사 본류에도 벗어나는 것이어서 본격적으로 수사할 상황은 아니다"는 게 검찰 관계자의 말이다.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은 "수사 본류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말이다. 검찰은 지금까지 독수독과론을 펼치며 도청 행위에 대한 수사에 주력해왔다. 물론 검찰의 이런 수사 기조는 통신비밀보호법에 근거한 것이다.

백번 양보해 검찰의 이런 수사 기조를 인정하다 해도 '그 누군가'의 '흥정' 시도는 당연히 수사 대상에 포함시켜야 하는 '본류'다.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소지가 다분한 '미수 사건'일 뿐더러, 삼성과 <중앙일보>외에 제3, 제4의 대상을 찾아가 똑같은 '흥정'을 했을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법률 문외한이 봐도 수사 착수 동기가 분명한데도 법률 전문가인 검찰은 수사 본류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왜일까? 수사를 확대하면 '흥정' 거리로 삼은 녹취록의 내용이 덩달아 노출되고, 그렇게 되면 도청 내용 수사를 꺼리는 자신들의 태도와 정반대되는 상황이 빚어질 수도 있기 때문일까? 역시 '상식적인' 의문이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한 가지 더 첨언하고 마무리하자. 검찰이 어제 김인주 삼성 구조조정본부 사장을 소환조사했다. 97년 대선자금 제공 의혹에 대해 조사를 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면서 일부 언론은 검찰이 도청 내용에 대한 수사로 넘어가는 것 아니냐는 전망을 내놨다.

하지만 바로 앞 단락에서 제기한 '상식적인' 의구심을 대입하면 또 다른 '상식'이 추출된다. 그것은 그저 통과의례일 가능성이 높다는 '상식적인' 분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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