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이 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푸시킨
<삶이그대를 속일지라도> 라는 러시아 대문호 푸시킨의 시이다. 어린 시절 중학교 교실에서, 단칸방 살림집 한쪽의 액자 속에서 자주 접했던 시 구절로 몇 번씩을 따라 읽어 내려가며 어린 가슴에 작은 감동을 주었던 ‘찡’했던 시였다.
이 시는 ‘인생의 본질과 인간의 의식 깊숙이 자리 잡은 근원적 고독에 대한 성찰’을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다. 푸시킨은 이 시에서 오랜 유배생활에서 체득한 인생을 달관한 투로 차분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당시 러시아 봉건사회에서 시인들이 겪어야 했던 강한 번뇌와 고독감을 자아내게 한다.
어쩌면 푸시킨의 대표적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처럼 고독감과 우울한 생을 보냈을지도 모를 푸시킨과 같은 국적의 러시아인이 상하이에 살았었다. 중국 상하이에 무려 5만여 명이라는 많은 러시아인들이 30여 년간을 러시아를 떠나 모여 살았다.
이 같은 상하이의 러시아인 이주사에는 1917년 레닌에 의한 러시아혁명 성공 이후 볼셰비키 적군과 짜르 왕정 출신의 백군 양쪽 간의 처절한 내전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었던 영화 <닥터 지바고>의 시대적 배경과 동일하다.
볼셰비키에 패한 백군들이 세운 상하이의 푸시킨 동상
1917년 2월의 자연발생적 러시아 봉기 이후 급거 귀국한 레닌의 이른바 ‘4월 테제’에 따라 피 흘림 없이 임시정부가 물러나고 1917년 10월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한다. 그러나 레닌의 혁명이 성공하고 나서도 오랜 기간 동안 왕정세력과 러시아내전을 치른다. 미국과 영국, 일본 등 외국 세력의 지원을 받는 백군과 트로츠키가 구성한 적군과의 내전이 발생한다.
백군과 적군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러시아 지식인, 제정 러시아 군대조직과 이를 지지했던 제정 귀족 출신들과 그 가족들이 우군이었던 국가의 조차지인 상하이로 대거 도망 나오면서 상하이는 러시아인들의 거리가 만들어지고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어 나간다.
상하이는 그 당시 세계 각국의 조차지로서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개방 도시였기에 세계 각국의 정치적 망명자들과 모험가들이 모여들어 나름의 정치적 활동과 활발한 상업 활동을 하였다. 그 이면에는 공공연히 마약 거래와 조직 폭력도 이루어지는 정치와 유흥 그리고 폭력과 쾌락이 난무하는 도시이기도 하였다.
그러다 차츰 불어나 상하이에 대거로 모여든 도피 러시아인들은 볼셰비키에 패배한 설움과 타국에서의 구차한 삶의 자조를 달래기 위해 자금을 모아 1937년 그들의 피난처였던 상하이 화이하이루(匯海路) 동쪽 편인 동평로(東平路) 분양로(汾陽路) 도림로(桃林路) 악양로 (岳陽路) 사각지역에 러시아 대문호 푸시킨 동상을 세운다.
그러나 비운에 단명한 푸시킨의 삶만큼이나 이 동상 또한 수난의 전철을 밟는다. 1937년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군은 러시아인들이 조성한지 얼마 안 된 동상을 철거하였다. 그러다 1947년 국민당 정부가 이지역의 관할권을 프랑스로부터 인수하고 나서 다시 동상이 재건되었다.
이후 푸시킨 동상은 또 다시 중국 마오쩌둥 통치시절인 70년대 중국문화혁명시기에 청산해야 할 문화잔재로 낙인찍혀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들에 의해 동상이 재 철거되었다가. 또 상하이정부에서 1987년에 복원한다. 파란 많았던 제정러시아 시절의 시인 푸시킨과 상하이 거주 러시아인들만큼이나 푸시긴 동상도 시대의 역사적 흐름에 따라 이처럼 많은 수난을 겪게 된다.
이 푸시긴 동상은 1989년 중국을 방문할 당시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방문하여 직접 참배하고 간 기념물이다. 그만큼 상하이에의 러시아인 이주사는 러시아혁명 정치사에 있어 의미가 담겨있는 현장이다. 한국인들의 상하이 임시정부청사만큼이나 러시아인들에게는 관심의 상징물인 셈이다.
짜르 귀족들이 상하이 술집의 연주자로 전락
볼셰비키와의 내전에서 트로츠키의 적군에 패한 백군 관련 러시아인들의 이주가 늘어나며 1930년대에 이르러 많을 때는 러시아인 상주 숫자가 5만여 명에 이르렀다. 그 숫자는 당시 상하이에 거주하는 외국인 전체의 13%에 달하는 많은 인원이었다.
1922년 12월 러시아 해군 장성 포함 수천 명의 러시아 난민을 태운 배가 상하이 진입 항구인 우송 연안 상륙으로 러시아 인들의 상하이 이주는 그 서막이 오른다. 그들은 공공조계지에 첫 터전을 마련하고 이후 점차 형산루, 화이하이루 근처의 프랑스 조치를 중심으로 러시아인의 집단 거주지를 형성한다.
볼셰비키에 패해 상하이에 도망 나온 러시아 백군들은 한때 상하이 주재 볼셰비키 정부의 대사관 침공계획까지 모의하다 발각되기도 하는 등 상하이 주재 소련 공관원들의 감시 대상이 되기도 한다.
상하이에 온 대다수 러시아인들은 자유주의 지식인, 짜르정부 시절의 귀족 출신들이며 짜르 왕정 시절의 군인들이었다. 그들은 상하이에 모여 러시아 거리를 조성하고 상점을 경영하고 그들의 종교인 러시아 동방정교회당을 세우는가하면 학교, 연극원 등을 세워 러시아의 독특한 문화생활도 이어나간다.
러시아인 이주번성기 때는 화이하이중로의 외국상점 중 한때 95%를 차지할 정도로 러시아인의 상점이 번창하였다. 고급 카페, 고급 음식점, 고급 양복점 등을 차리고 상하이 거주 외국인과 부유층 중국인을 상대로 영업을 하며 돈을 모으고 생활을 해 나갔다.
이처럼 일부 계층은 서양식 상점을 차리고 돈을 벌기도 하였으나 러시아 짜르 정부 때의 귀족적인 생활을 포기하고 궁중 생활 중에 연마한 특기를 살려 경마장의 교관으로 호텔술집의 악기연주자로 연명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이들도 많았다.
또한 낯선 땅에서 적응을 하지 못하는 러시아 귀족 출신자들은 생존을 위해 매춘으로 마약중독자로 비참한 생활을 하는 이들도 늘어나 상하이의 다른 외국인들에게 천한 민족으로 손가락질을 받는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다.
유입인구가 불어난 1931년에는 러시아계 유태인들이 밀집거주지에 유태인음악구락부를 만들어 다양한 오락 활동과 음악 연주회 , 연극, 예술전시회 등을 개최하고 상하이음악대학의 전신인 상하이고등음악학교를 개설하기도 한다.
러시아 왕정 출신 고급 연주자들이 세운 음악 세계
그해 1931년 일본군이 만주 지역을 침공하자 러시아 소속의 동정교회 신교들과 러시아 전국의 신도들이 상하이로 모여들기 시작하여 동정교회는 또 한 차례의 성시를 이룬다. 동정교회 총본당, 동정교회 분당인 형산루 만당, 러시아인이 세운 학교들을 중심으로 러시아 정교회를 전파하고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어 나가기도 한다.
당시 상하이에서의 러시아인이 펼치는 예술과 문화적 수준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러시아 귀족 출신들은 음악과 예술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상하이에서 전문 음악 연주계에 두각을 나타내었다. 지금의 상해음악학원의 출발도 바로 러시아의 제1고등음악학교에서 나왔다. 학교 초기의 주요 교사들도 왕정 시절의 뛰어난 연주 실력을 가졌던 러시아 연주가이었다.
이들은 화이하이중루(匯海中路)에 러시아의 독주인 보드카 카페를 열고, 러시아식 창과 원형지붕, 흑백을 가미하는 러시아 건축양식, 러시아식 음식문화 등 스라브 민족의 특징 있는 문화를 상하이에 전해나가며 정착해 나갔다.
그러나 이처럼 왕성한 활동을 하던 러시아인들도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 일본의 점령, 미국, 영국, 프랑스의 조차지 철수 등 정치적 격변을 지켜보다 다른 나라로 또다시 유랑의 길을 걷게 된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에도 남아 있던 사람들은 중국국민당이 중국공산당에 패전하고 대만으로 도망가는 시기를 전후하여 또다시 뿔뿔이 흩어져 과거 볼셰비키와 싸우던 시절의 후원자였던 미국, 대만, 일본, 프랑스, 영국 등으로 각자의 삶을 찾아 떠나는 유랑자의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다른 나라로 러시아인들이 떠나버려 지금 상하이에서 그 당시 러시아인들을 볼 수는 없지만 그들이 생활했던 70여 년 전의 건축물과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이 건축한 러시아 전통 건축양식의 건물들, 그들이 남기고 간 음악세계 등이 지금도 남아 있어 그것들을 통해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사를 중국 상하이 에서 다시 읽을 수가 있다.
지금은 한 때 소련을 수정주의라고 비판하는 중국이었지만 지금은 경제적으로는 많은 러시아 기업인들이 들어와 각종 경제사업을 하고, 정치적으로는 후진타오 중국 당총서기겸 국가주석과 푸틴 러시아의 잇단 회담에서 보듯 중국과 러시아는 전략적 협력과 동반자 관계의 틀을 다져나가고 있다.
상하이에서 다시 읽게 되는 러시아혁명사는 김학준 교수의 저서 <러시아혁명사>를 처음 접할 때보다 더 흥미진진함을 자아내고 있는 것은 러시아 혁명사의 그 현장을 직접 보고 있기 때문이리라.
| | 짜르 왕정의 함정에 '사랑의 결투'로 죽은 푸시킨 | | | | 모스크바에서 1799년 명문 중류 귀족의 장남으로 태어나 38세에 단명한 러시아 문학가로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을 확립한 러시아 대표적 문호이다. 친지인 카람진 제코프스키 등 러시아 낭만주의 시인들의 영향에서 자랐고 당시 수도였던 페테르부르크 근교의 차르스코예셀로 전문학교에 다녔다. 졸업 후에는 페테르부르크 외무성에 근무하기도 하였다.
1820년에 최초의 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 Ruslan i Ljudmila> 완성하였고 이후 <농촌> 등 작품을 통해 자유를 갈망하는 내용의 시가 발표되자 제정러시아에 의해 남부 러시아로 유배되고 유배지에서 남부지역 문학가들과 어울리며 서사시 낭만주의 작품을 탈고한다.
1824년 국외 망명을 시도하나 좌절되고 미하일로프스코에 마을에 다시 유배되어 여기서 서사시 <집시 Tzygany>, 시형식 소설 <예프게니 오네긴 Evgenii Onegin >, 풍자적 서사시 <누손 백작> 등을 탈고한다.
푸시킨에 따라 붙는 고독하고 불우한 유배생활은 오히려 러시아의 역사적 운명과 농노들의 생활 등에 깊은 사상적 통찰을 하게하고 이를 바탕으로 예술적 작품으로 승화시켜 나간다.
푸시킨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는 <대위의 딸 Kapitanskaya dochka> 등으로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초석을 쌓는다. 마지막 서사시 <청동(靑銅)의 기사 Mednyi vsadnik> 에서 전제적 국가권력과 개인과의 대립 모순을 조명(照明)하고, 제정 러시아의 역사적 숙명을 제시한다.
그러나 푸시킨은 1837년 1월 27일 아내 나탈랴를 짝사랑하는 귀족과의 결투로 부상하여 2일 후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다. 이 비극적 결투는 푸시킨의 자유주의적 저항 사상을 두려워하는 왕정세력의 함정이었다고 말한다.
대부분 유배생활 중에 발표한 푸시킨의 작품들은 농노제하의 러시아 현실을 그려낸 작품이 많다. 푸시킨의 깊은 사상과 높은 예술적 작품의 영향을 받아 푸시킨이 죽은 후 러시아 문학사에 그의 사상을 따르는 작품들이 많이 나오는 등 러시아 근대문학사의 주춧돌이 된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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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유창하 기자는 다음 카페 '중국 상하이 한인 모임' http://cafe.daum.net/shanghaivillage 운영자이다. 중국 상하이의 역사 자연 문화를 전하며 상하이 한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알리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