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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처녀는 비틀거리면서도 함부로 김가의 등에 업히지 않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허가가 소리를 지르며 쫓아올 것처럼 위협하자 마음이 다급해진 김가는 처자를 억지로 들쳐 업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놓으시오!"

처녀는 김가의 등을 마구 후려쳤지만 당분간은 마구 내달리는 그의 등에 몸을 맡긴 채 갈 수 밖에 없었다. 한참을 달린 후 친구들이 더 이상 쫓아오지 않음을 확인한 김가는 처녀를 내려놓은 후 땅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가다듬었다. 처녀 역시 땅바닥에 주저앉아서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김가를 바라보았다. 김가가 처녀를 보니 달빛아래 보이는 자태가 아름다워 술기운을 빌어 저도 모르게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주는 척 손을 뻗었다.

"무슨 짓이오!"

처녀는 몸을 뒤로 물리며 김가의 뻗은 손등을 '짝'소리가 나도록 후려갈겼다. 당황한 김가가 그게 아니라며 손을 흔들려 하자 처녀는 아예 달려들어 김가의 손을 힘껏 물어버렸다.

"아이고!"

김가는 손을 빼기 위해 버둥거렸고 처녀는 잇자국만 남긴 채 냉큼 일어서 쩔뚝거리면서도 필사적으로 달려갔다. 김가는 그 모양새를 바라보며 어쩐지 재미있다는 생각과 호감이 생겨 빠른 걸음으로 처녀의 뒤를 뒤쫓았다. 제법 큰 집에 도착한 처녀는 쫓아오는 김가를 의식하며 뒤를 돌아본 채 다급히 대문을 마구 두드렸고 놀란 하인들이 대문을 열자마자 안으로 사라졌다. 대문까지 다가간 김가는 잠시 망설이다가 '에라 모르겠다.'하는 심정으로 천천히 대문을 두들기며 소리쳤다.

"이리 오너라! 내 이집의 처자에게 볼 일이 있느니라! 이리 오너라!"

집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고 김가는 대문을 두드리며 같은 소리를 반복했다. 이윽고 문이 벌컥 열리더니 몽둥이를 든 우악스러운 하인둘이 나타나 김가의 멱살을 잡고 패대기를 쳤다.

"네 이놈! 네 놈이 아씨를 희롱했것다!"

집안에서는 정자관을 쓴 처녀의 아버지가 노한 눈으로 끌려오는 김가를 보고 호통을 쳤다.

"갓을 쓴 것을 보니 상것은 아닐진저! 대체 뉘 집 자식이기에 이토록 망발인가!"

그때서야 술이 확 깬 김가는 고개를 조아리며 잘못을 빌었으니 처녀의 아버지는 김가를 꾸짖으며 아침에 김가의 집으로 찾아가겠노라고 하며 김가의 이름과 그 집안의 부모는 물론 조부, 외조부의 이름까지 써 놓고 갈 것을 요구했다. 다음날 김가의 집에는 느닷없이 사주단자가 보내어졌다.

"내 이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기에 의혼도 없이 사주단자가 온단 말이냐!"

김가는 그 일로 집안어른들로부터 심한 꾸중을 들었지만 그 아리따운 처녀와 혼인을 할 수 있었다. 꼬장꼬장한 처녀의 아버지가 딸이 옷이 찢겨진 채 집에 들어서자 지레짐작을 하여 서둘러 혼인을 성사시킨 것이었다. 첫 만남이 순조롭지는 않았지만 일단 혼인 후 부부의 금슬은 좋았다. 그런 그들에게 크나 큰 시련이 닥쳐왔다. 바로 임진년 왜란이었다.

"서둘러야 하오! 임금도 피난을 갔다하오!"

남들보다 늦은 피난에 몸이 단 김가는 아내를 재촉했고 그들은 여러 피난민과 더불어 길을 떠나게 되었다.

노인의 말은 여기서 더 이상 이어지지 않고 낭떠러지로 떨어지듯 뚝 끊겨 버렸다. 마치 누군가가 억지로 말문을 막은 양 노인은 묵묵히 고개를 숙여 땅만 바라볼 뿐이었다. 장판수는 노인의 말을 재촉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렸다.

"…전란 와중에 아내는 왜놈들에게 끌려가 겁간을 당했네. 그것도 나와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말일세."

너무나 무겁고도 침울한 노인의 말에 장판수의 가슴이 무거운 돌에 눌린 듯 죄어왔다.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네. 왜놈들은 날 죽이지도 않고 비웃기만 했네."
"…"
"아내는 죽으려 했지만 난 필사적으로 말렸다네! 남들의 손가락질 따윈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어! 그 충격으로 아내는…40년 전부터 저 모양이 되었지만 난 결코 내칠 수가 없었네. 집안에서 뭐라고 하던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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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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