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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탄 아흐멧지구로 가는 도중에 볼 수 있는 전차길 풍경. 레일이 깔린 길에는 자잘한 돌들로 만들어진 예전 마차길의 자취가 남아있다.
술탄 아흐멧지구로 가는 도중에 볼 수 있는 전차길 풍경. 레일이 깔린 길에는 자잘한 돌들로 만들어진 예전 마차길의 자취가 남아있다. ⓒ 김정은
두바이를 출발한 비행기는 5시간 정도를 날아 터키 이스탄불의 아타투르크 공항에 나를 내려놓았다.

나에게 있어서 터키란 나라는 한국전쟁 때 참전하여 수많은 젊은 영혼들을 이국땅에 묻은 '형제의 나라'라는 상투적인 의미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2002년 월드컵 3ㆍ4위전? 그도 아니면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자기 몸무게의 3배를 들어올려 터키 최초로 금메달을 목에 건 괴력의 역도선수 술레이마놀루? 그도 저도 아니면 한국어의 원형이라는 알타이어?

'인류 문명의 살아 있는 옥외 박물관' 이스탄불

나는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역사적인 향취를 아직도 간직한 터키에 고대 서구문명의 원형을 찾아 왔지만 내 몸 속에 습관적으로 박혀 있는 현대 터키의 이미지는 서구문명의 원형과는 너무 거리가 먼 나라였다.

여행하는 동안 누군가가 이런 얘기를 했다. "유럽의 서구인들은 오리엔탈리즘의 흔적을 찾아 터키를 오고 동양인들은 이곳에서 서구문명의 흔적을 찾으려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공항에서 출발하여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이스탄불 땅에 발을 디디는 순간 나도 모르게 짧은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자잘한 돌들로 단단하게 만든 예전 마차길….

이스탄불을 두고 "인류 문명의 살아 있는 옥외 박물관"이라고 했다는 역사학자 토인비의 미세한 감정의 떨림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 지금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지금의 터키가 아닌 옛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땅을 밟고 서 있는 것이 아닐까? 가벼운 흥분과 떨림으로 터키에서의 첫날이 시작되었다.

히포드롬 광장의 오벨리스크. 그 뒤에 짝퉁 오벨리스크라는 흉칙한 모습의 콘스탄티누스 기둥이 보인다
히포드롬 광장의 오벨리스크. 그 뒤에 짝퉁 오벨리스크라는 흉칙한 모습의 콘스탄티누스 기둥이 보인다 ⓒ 김정은
처음 찾아간 이스탄불의 술탄 아흐멧 지구는 이 지역 자체가 통째로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터키에서도 첫번째로 손꼽히는 관광지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는 성소피아 성당을 비롯해서 바로 그 옆에 첨탑이 6개인 유일한 이슬람 사원, 블루 모스크, 로마의 황제 세비루스에 의해 지어진 검투경기장이었다는 히포드롬 광장 등 동서양을 아우르는 유적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기 때문이다. 이 유적들 모두 그 역사적인 위용은 물론이거니와 험난한 역사 속에 갖은 수모를 겪으면서 이제까지 버텨온 질곡의 이야기가 더욱 가슴 찡하게 만드는 유적들이다.

히포드롬광장의 기구한 역사

지금은 커다란 광장으로 변해버린 히포드롬(hippodrome)광장은 '히포드롬'이라는 명칭대로 처음 검투경기장으로 지어진 원형극장이었는데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검투 경기가 금지되면서 영화 <벤허>에서 본 듯한 대전차경기장으로 바뀌었다.

10만명 정도 수용이 가능했다고 하는 이곳은 후에 시민들이 모여 장관의 파면을 요구하는 등, 단순한 경기장이 아니라 정치적 의견을 논하기도 한 비잔틴 시민활동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지금 내 앞에는 원형경기장의 흔적은 어디에도 간 곳 없다. 그 이유는 바로 13세기 초 십자군 전쟁에서 찾을 수 있다.

십자군 전쟁 당시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결과 대부분의 유적이 파괴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이 히포드롬광장이 유명한 이유는 광장 중앙에 서 있는 세개의 기둥(?) 덕분이다.

그중에서 가장 내 눈을 번쩍 뜨게 만든 것은 하늘을 찌를 듯 왼쪽에 서 있는 오벨리스크였다. '테오도시우스 1세의 오벨리스크'라 명명된 이 오벨리스크는 이집트의 왕 '투트마시스 3세'(ThutmasisIII) 치하(기원전 1502-1448년)에 이집트의 고대도시인 '룩소'에 있는 카르낙 신전에 세워진 4개의 오벨리스크 중 하나였는데, 약 2000년 후인 390년에 로마의 황제 유리아누스가 콘스탄티노플로 가져와 테오도시우스 1세가 이곳에 세웠다고 한다.

이것을 세우는 데만 32일이 소요되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그마저도 수송중에 40%가 훼손된 상태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지금 대리석 받침대 위에 세워져 있는 오벨리스크의 높이가 24m이니 원래 규모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대리석 받침대의 4면에는 동서남북으로 정복자로서 충성을 서약받고 있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모습이라든가 경주를 관람하고 있는 황제의 모습, 월계관을 수여하는 황제의 모습 등 로마의 영향을 느낄 수 있는 조각이 새겨져 있다.

오벨리스크 대리석받침 조각. 조공을 받는 테오도시우스1세(좌상), 경주승자에게 씌워줄 월계관을 들고 있는 왕의 모습(좌하), 경주를 관람하고 있는 황제와 가족, 경호원(우상), 오벨리스크 세우는 모습을 관람하는 황제와 가족들(우하).
오벨리스크 대리석받침 조각. 조공을 받는 테오도시우스1세(좌상), 경주승자에게 씌워줄 월계관을 들고 있는 왕의 모습(좌하), 경주를 관람하고 있는 황제와 가족, 경호원(우상), 오벨리스크 세우는 모습을 관람하는 황제와 가족들(우하). ⓒ 김정은
그러나 이 조각들을 보며 갑자기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다른 나라 문화재에 자기네 황제의 일상사를 새긴 대리석 받침대를 올려놓는 식의 문화재 훼손은 물론이고, 대표적인 약탈문화로 세계 각국에 전승탑처럼 서 있는 오벨리스크들의 행보를 통해 본 서구문명 특유의 오리엔탈 유적 약탈사 때문이었다.

이집트 태양신의 상징이 터키까지 온 까닭은?

오벨리스크란 고대 이집트인들이 숭배해온 태양신 라(Ra)의 상징이다. 그런데 문제는 피라미드와 더불어 이집트를 대표하는 이 보물이 16세기 중엽부터 식민지 건설을 위해 아프리카 대륙에 침입한 유럽인들에 의해 대부분 해외로 유출되어 현재는 미국ㆍ영국ㆍ프랑스ㆍ이탈리아ㆍ터키ㆍ러시아 등지에 두루 퍼져 있는데다가 마치 자기 나라의 문화 유산인 양 당당하게 세워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 나라들이 이집트의 유물을 제 나라에 세워놓고 마치 자국의 상징인 양 뽐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르긴 몰라도 식민지의 유물을 빼앗아 가장 중요한 곳에 세워놓음으로써 식민지 쟁탈전에서 승리했다는, 자국의 위세와 권력을 대내외에 과시하려는 용도가 아닐까?

정복자의 천박한 제국주의적 발상에 씁쓸해하며 반대쪽을 보니 오벨리스크와 대칭되는 오른쪽에 오벨리스크와 비슷한 크기이나 흉한 몰골의 기둥 하나가 서 있다. 오벨리스크를 본따 당시에는 더욱 화려하게 만들었다는 일명 '콘스탄티누스의 기둥'이라고 알려진 콜로수스(The Colossus)이다.

아폴론 신전에 바쳐지기 위해 만든 그리스 전승기념 뱀기둥. 뱀머리 조각 세 개중 하나는 이스탄불박물관에, 또 하나는 대영박물관에 있고 나머지 뱀머리 조각은 발견되지 못했다.
아폴론 신전에 바쳐지기 위해 만든 그리스 전승기념 뱀기둥. 뱀머리 조각 세 개중 하나는 이스탄불박물관에, 또 하나는 대영박물관에 있고 나머지 뱀머리 조각은 발견되지 못했다. ⓒ 김정은
AD 940년 콘스탄틴 7세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서 이름붙여진 이 기둥은 높이 32m로, 다분히 반대쪽의 오벨리스크를 의식한 느낌이 든다. 오벨리스크보다 더욱 높게, 더욱 화려하게 만들고자 기둥 표면을 청동으로 덮어씌우고, 그 위에 농부와 어부들의 모습을 새겨 놓았다는 이 기둥은 제4차 십자군이 들어와 이 기둥의 청동을 벗겨서 동전 및 주조에 사용했기에 현재는 청동을 벗긴 흔적 그대로 흉측스런 돌기둥이 되어버린 가슴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처럼 오벨리스크와 콘스탄틴 기둥, 양쪽 모두 가슴 아픈 비운의 상처들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이집트에서 옮겨오는 도중 허리가 잘라져버린 데다가 고향이 아닌 이국에서 어울리지 않은 대리석 받침대에 정착하는 상처를 입었지만 그래도 부족한 대로 의연히 살아남아 이 히포드롬 광장의 명물이 되었다.

그러나 오벨리스크를 본따 그보다 더 튀어 보이겠다는 의지로 만들어놓은 '짝퉁 오벨리스크' 콘스탄티누스 기둥은 초기에는 화려했을지 모르지만 십자군 원정이라는 비운의 상처 한방으로 지금처럼 흉측한 몰골이 되어버렸다.

진품과 짝퉁의 차이도 이런 것이 아닐까? 진품은 어떠한 난관에도 나름대로 독자적인 향기를 잃지 않지만 독자적인 생각 없는 카피본은 아무리 진품보다 화려하더라도 어려움에 봉착하면 결국은 아무런 향기없는 짝퉁으로 전락해버린다는 사실을 말이다.

보기에는 단순한 세 기둥이지만 어느 것 하나 구구절절한 사연 없는 것이 없다.

다양한 국적과 기구한 운명의 세 기둥

중앙에 있는 이상하게 생긴 청동제 뱀 기둥(Serpentine Column) 또한 앞서 언급한 두 기둥 못지않은 기구한 운명을 산 기둥이다.

이 기둥의 용도는 BC 479년 그리스가 페르시아 제국과의 살라미스 해전 및 프라테(플라미) 전투의 승전기념으로, 전쟁 때 압수한 페르시아군의 무기를 녹여서 그리스에 있는 델피의 아폴로신전에 바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기둥을 감고 있는 세 마리의 뱀은 단결을 의미한다고도 하고 전쟁 중 쓰러진 페르시아 전사의 방패에 부조되어 있던 청동뱀이 튀어나온 것이라는 전설도 있지만, 단결을 의미한다는 앞의 이야기가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이 기둥의 아랫부분에는 전쟁에 참여한 31개 도시국가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31개 도시국가의 단합 내지는 동맹관계를 표현했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그리스 아폴로신전에 있어야 할 이 기둥이 왜 이곳 터키로 왔을까? 그 주범은 바로 콘스탄티누스 대제다. 그가 어떤 생각으로 이곳에 이 기둥을 가지고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에 의해 옮겨질 때 원래 8m 높이의 기둥 위에 있던 금으로 만든 황금꽃병은 없어져 버렸고, 그 후 뱀머리 부분도 없어진 채 이상한 몰골로 이곳에 남아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일은 제자리에 같이 있어야 할 뱀머리 세 개가 하나는 이스탄불 박물관에, 또 하나는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고이 모셔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세 머리 중 두 개의 행방은 알았으니 그걸로 만족해야 하는 것일까? 아직도 행방불명인 또하나의 뱀머리는 어느 땅에 파묻혀 잠을 자고 있는지…. 혹 청동 주물로 녹여져 또 다른 인생으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국적도 다양하고 각자의 사연도 기구한 이 세 기둥의 존재감과 각각의 기구한 운명과 상처에 대해 묘한 정감을 느낀다. 천만다행인 것은 이 기둥들은 그래도 다른 기둥과 돌들처럼 해체되어 '블루 모스크' 건축자재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호흡 한번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그 옆에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는 건축물, 히포드롬 돌들의 최후의 무덤이자 정복자의 역사를 간직한 이슬람 사원 블루 모스크를 향해 출발했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는데 내게 주어진 시간은 짧고 볼 것은 너무 많았다.

 

덧붙이는 글 | 7박 8일 터키여행기 네번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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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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