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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판수는 노인의 말이 완전히 끝난 후에도 입을 열지 못했다. 노인의 말은 단순히 신세타령이나 옛 이야기와는 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새참이나 먹세."

새참이라야 봤자 짠지에 작은 주먹밥이 고작이었지만 장판수는 이를 달게 먹었다. 짧은 식사 후 노인과 장판수는 말 그대로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베게 삼아 누워 낮잠을 청했다. 노인은 장판수가 자는지 곁눈으로 한번 슬쩍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

"자네는 무엇을 위해 풍산으로 가서 그자들을 만나는 것인가?"

이유는 간단명료했지만 장판수는 재빨리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지지 않기 위해서가 아닌가?"

장판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노인은 이미 장판수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렇겠지. 자네는 지지 않겠다는 마음가짐 속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게야. 어쩌면 그 자들과 자네는 조금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르네. 오랑캐들에게 짓밟히기나 하는 이 따위 썩은 세상은 필요 없다!"

장판수는 고개를 돌려 휘둥그레 한 눈으로 노인을 쳐다보았다.

"뭘 그렇게 보나? 내 말이 틀렸나?"

장판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자들과 자네는 틀린 게 있어. 그 자들은 제 것으로 만들려 하고 자네는 자신의 몸을 아낄 줄 모르고 그저 내던지려고만 하지."

그때서야 장판수는 말문을 열었다.

"그렇다면 제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입네까?"
"아닐세...... 난 지금 누가 잘한다거나 잘못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네. 하지만 이미 자네가 하고자 하는 바는 마음속에 정해 두지 않았나?"

장판수는 벌떡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이런 고생이 무슨 소용이 있습네까? 전 모든 걸 피해 갈 수 있었습네다. 이젠 너무 지쳤을 뿐입네다."
"아닐세!"

노인도 천천히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피해 가면 다른 시련이 올 걸세. 자신 앞에 놓여진 상황을 감사히 여기며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네. 비록 우리 할망구가 저 모양이 되었지만 내가 저이를 내치면 마음이 편할까?"

"저 혼자 설친다고......"

장판수는 말머리를 꺼내는 순간 말문이 닫혀 버렸다. 전쟁 중 목숨을 잃은 수많은 이들, 지금도 의주에서 다음을 기약하는 차충량, 예량 형제와 최효일이 있었기에 그는 결코 혼자라고 할 수 없었다.

"당장 도와줄 이가 없다고 혼자라고 생각하지는 말게나. 스스로 돕다 보면 뜻하지 않게 도움을 받게 된다네. 미친 할망구를 데리고 사는 늙은이가 있는 인적 드문 이 산골에서 내가 살아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준 이가 누군지 아나?"

먼 산을 쳐다보는 노인의 눈가에 물기가 약간 비쳤다.

"결국 우리 할망구였어...... 할망구에게 원망도 많이 하고 저대로 놔두고 어디론가 가 버릴 생각도 수 없이 했지. 그렇지만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할망구를 죽게 놓아둔 죄책감으로 한평생을 살다가 죽어 버렸을 게야."

"...... 그게 다 노인장께서 할머니를 아끼는 마음이 아닙네까?"

장판수의 말은 묘하게도 노인의 말에 반발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노인은 입가에 잔잔히 웃음을 뗬다.

"그건 핑계에 지나지 않네. 사실 난 내 인생을 아끼는 마음에서 그랬던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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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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