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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초따라 5만리
먼저 혜초에 대해 지극히도 여탐한 김규현의 노정에 대해 짚자. 나는 그의 책바라기를 따라가면서 일순간 질린 기분까지 들었다. 10년 동안 20회에 걸쳐 12개국을 다니며 발로 쓴 책이다. 사진 한 장 글 한 줄에 보통 여상스럽지 않다. 혜초학이라는 지난한 주제에 대해 깊도록 천착한 이 알심 단단한 책은 요즘 유행병처럼 쏟아지는 책상머리 인문학 책들과는 분명 다른 진한 땀내가 배여 있다.

K, 그러나 나는 안타까웠다. 가이없는 생의 마지막. 먼가래 뒤에 이제는 골육도 다하여 뼈 한 조각도 없겠지만, 굳히 '신라사람 혜초'로 챙겨 부르는, 1300년 전 <왕오천축국전>의 고승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 태를 묻은 곳도 심지어 사리가 묻힌 곳도 알지 못한다. (이 책에서 김규현은 혜초의 열반지에 대해서 건원보리사가 아닌 중국 오대산 금각사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혜초의 마지막 번역서인 <천발대교왕경> 서문에 나오는 오대산 건원보리사가 금각사의 별칭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김규현은 건원이 당나라 8대 황제인 숙종의 연호로, 따라서 건원보리사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건원황제의 명복을 비는 원찰을 뜻하는 상징적 보통명사라 주장한다.)

심지어 <왕오천축국전>의 원본조차 우리에게 없다. 이제는 흐트러진 사막의 도시 둔황토굴 속에서 발견된 축약본의 일부는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K, 내 책상 위에는 지난 달 실크로드 길을 가던 한 벗에 부탁해 받은 모래병 하나가 있다. 바로 둔황의 모래. 혜초의 글이 잠들어 있던 그 땅의 모래다. 나는 그 따스하고 보드란 모래알을 만지며 그 시간의 무상함에 전율했다. 혜초가 밟고 지나갔던 모래다. K, 이 모래들은 1300년 전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나는 1300년 후 어떤 모래 한 알일까. 참으로 해감하다. 혜초가 한마음 받기 위해 떠난 인도에서 불교의 자취는 이미 삼사라의 업을 다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혜초의 글로 초발심을 낸 얼마나 많은 해동의 승려들이 그 길을 갔는지 모른다. 그들이 가서 보고 몸으로 익힌 것까지 우리 문화의 원류가 되었다. 혜초는 없으되, 혜초의 글은 남았고, 수많은 기이한 인연 끝에 우리는 그를 찾아냈다. 우리는 그의 한뉘를 되살려 낸다. 법등명 자등명의 숭고한 한뉘다. 그런 무심한 생의 씨줄과 낱줄이 얽혀 오늘의 우리가 있다.

책맛보기 64p

물론 저 바람 속으로 들어갔던 유무명의 구도승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러 자료를 종합해보면, 3세기에서 11세기까자 약 180여명이라는, 적지 않은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의정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을 보면 당나라 때만해도 육로로 23명이 천축행을 했다. 티베트를 경유하여 천축으로 갔다는 구법승도 8명이나 된다. 하지만 아마도 훨씬 더 많은 무명의 순례자가 사막이 고혼이 되었으리라….

그 중에서 우리의 혜초는 우뚝하다. 현장의 <대당서역기> 같은 방대한 저술은 못 남겼지만, 처음 목적이었던 나란다 대학의 입학시험을 통과하지 목해 학승으로 대성하지는 못했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우뚝하다.

혜초는 중국말도 능숙하게 사용하지 못하던 변방의 외국인이었고, 물질적 후원자도 없었다. 준비기간마저 짧아서 현지 언어조차 제대로 배울 시간이 모자랐다. 더구나 5만리나 되는 머나먼 길을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걸었다는 것 자체는 의미 깊은 일이다. 물론 우리 한민족 중에서는 혜초에 앞서 15명의 승려들이 천축행을 했다. 일본의 경우엔, 중원 땅까지 건너간 유학승이 여러 명 있었고, 9세기의 엔닌 법사 같은 경우는 <입당구법순례기>라는 걸출한 여행기도 남겼다. 하지만 천축행을 꿈꾼 일본인은 한 명도 없었다.

천축구법은 중원인들만의 잔치였고, 그러기에 임이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추사진묵>... 평범하고 절절한 그리움에 눈뜨다

ⓒ 추사진묵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고희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몇 해 전이던가. 기억은 아련하다. 남도길에 녹우당과 다산초당 백련사를 거쳐 완도에 행장을 풀었다. 완도의 한 고택 처마 밑에서 추사의 이 글이 집자된 현판을 보았다. 그때 허기진 나그네는 추사의 심정이 분명 대패두부과강채(가장 좋은 반찬은 두부ㆍ오이ㆍ생강ㆍ나물)에 박혔노라 짐짓 의뭉떨었건만, 이제 <추사진묵>을 읽고 다시 반추하니, 고희부처아녀손(가장 좋은 모임은 남편, 아내와 아들딸과 손자)이라는 평범하고 절절한 그리움에 눈 뜬다.

K. 나는 추사의 여러 진묵 중에서 이 글을 가장 사랑한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하게 된다. K. '대팽두부'는 추사의 마지막 예서 작품이다. 이 아름다은 글은 불꽃 같은 생의 마지막에서 골을 뽑아 붓을 풀고 피를 뽑아 먹을 삼았던 열열한 추사가 보여주는 만년의 경지다. '완성된 인간'이 도달해서 후학들에게 보여주는 위대한 한 경지다.

K. 유홍준의 <완당평전>이 일으켰던 소동을 떠올려 본다. 한 때 인사동에는 완당보다 완당의 글을 더 잘 본다는 감정가들이 있었다. 지금도 그러할지 모르겠다. <추사진묵>은 논쟁에 대한 치열한 연구를 바탕으로 쓰여진 글이다. 추사의 글을 우리는 젊은아이들의 말로 '열공'하면서 보아야 한다. <추사진묵>은 알 듯 모를 듯한 무지한 나 같은 까막눈도 한 공부가 되는 좋은 책이다. 그것은 추사가 우리에게 주는 귀중한 배움의 기회다.

책맛보기 19P

김정희는 그의 저서 <난화일권>에서,

"서화하는 것은 비록 작은 기예요 곡예이나, 그 자신의 마음을 오로지 다하여 서화하는 행위는 성인공부(聖人工夫) 하는 데 격물하여 치지하는 학문과 하나도 다름이 없다. 말하자면 군자의 한 손짓 한 걸음의 행동이 덕이 없고 도가 아니면, 그 자신이 그리고 만들어 쓰고 즐기고 좋아하는 물물의 옳고 그름을 또한 어찌 논할 가치가 있으리오? 이와 같이 도와 덕을 갖춘 군자의 행위가 아니면 곧 악마의 세계에 속된 스승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하셨으니, 두 분 모두가 서, 화, 도, 덕이 동일함을 강조하셨다.


<모던 디자인 비판>... 디자인도 우리를 바라본다

ⓒ 모던디자인 비판
K. 인간은 언죽번죽 뭔가를 만들어내기를 좋아한다. 애면글면한 예술의 노력을 지극히 톺아보면 인간의 모든 것들이 그렇듯 시간의 독에 중독되어 모래알처럼 파열되고 종내 바스러지고 만다. K, 나는 디자인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의 노력에 대해 헤살놓으려는 것은 아니다.

카시와기 히로시의 <모던 디자인 비판>은 디자인에 관한 상당히 깊은 이야기여서 디자인사에 무심했던 나는 한줄 한줄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대단히 마음에 드는 장이 있었다. '폐기인가 회수인가'다. <모던 디자인 비판>은 현대문명의 치명적 독소에 대해 '디자인' 관점의 인식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했다.

우리들이 물건을 생산하는 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부산물들을 발생시키고, 그 부산물들은 '죽음'으로 유도된다. 한 곽의 과자로 칼로리를 섭취하기 위해서 우리가 뜯어버리는 종이와 또 포장되기 위한 박스 등을 생각해보면 엄청난 낭비다. 우리는 고령화 사회로 가고 있다. 인간이 '리사이클링' '리유즈'되는 시대다.

K. 현대 문명이 가지는 물신적 풍조는 물건이 가지는 아우라 그것 자체가 보유한 것으로 우리는 그 에너지를 특정한 물건으로 획득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우리가 자동차에서 느끼는 감정, 잘 지은 집에서 느끼는 감정은 그 '물건'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 속 '디자인 인식'에서 형성된 것이다.

물건의 정신으로 물건을 만들면, 그 물건은 사람을 지배한다. 핵심은 모던 디자인을 주도했던 '대중'의 근본적 변화일 것이다. 우리가 '디자인'을 바라보기 시작하면(인식하기 시작하면), 디자인도 우리를 바라본다.

책맛보기 94P

우리는 다양한 상품(대상)에 대해 갖는 욕망을 보통 물건 그 자체에 뿌리박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이에 대해 지라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로맨틱하고 허영심이 강한 사람은 자신의 욕망이 물건의 본성에서 비롯된다거나 (결국 동일한 것이지만) 순수한 주관의 발로라고 생각한다. 거의 대부분 신의 자아처럼 무에서 창조되는 것이라고 항상 믿고 싶어한다."

우리들의 욕망은 우리들 주체의 심리학적 분석이나 욕망의 대상이 가지고 있는 본질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들다는 것이 지라르의 생각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철조망'에 스스로 갇힌 이스라엘

ⓒ 죽음의 수용소에서
K. 지금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철수라는 상한 당근을 내밀고는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에서 대규모 장벽을 건설하고 있다. 높이 8m에 총길이만 640km의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와 전자 장비로 보호되는 철조망 라인이다. 우리의 DMZ가 155 마일, 그러니까 250km이니 이스라엘이 지금 벌이고 있는 분단 행위가 얼마나 치명적인 길이인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이 장벽이 팔레스타인의 자살 폭탄에서 자국민을 보호할 수단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장벽을 완성하면,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전체 면적의 16.6%가 장벽 속에 '감금'된다. 본의 아닌 죄수가 되는 주민들이 무려 16만명에 이른다. 장벽 속에 갇힌 팔레스타인들은 어제까지 한 마을이었던 어머니를, 형제를 만나지 못한다. '게토'다. 국제여론도 국제사법재판소도 모두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억압한다고 반대하는 장벽을 이스라엘은 강행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정신병에 걸려 있다.

그 자신이 독일 강제수용소의 피해자인 빅터 프랭켈의 관점으로 보자면, 이스라엘은 거대한 '철조망병 증후군'을 앓고 있다. 유대인이 오랜 세월 동안 박해받은 분노와 고통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박해의 피해의식이 아무리 절절해도 이스라엘이 새로운 가해자가 되는 자격증명을 내어주지는 못한다. 가해자가 되는 순간 그 폭력의 정당성은 상실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장벽은 팔레스타인을 가두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다. 빅터 프랭켈은 말한다. 지옥 같은 수용소 환경 속에서도 성자와 악마를 인간은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결국 언젠가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 선택을 해야 할 시기가 올 것이다. 빅터 프랭켈이 복수를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승리했듯이.

책맛보기 120P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자취를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제수용소에 있었던 우리들은 수용소에도 막사를 지나가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거나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누어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물론 그런 사람이 아주 극소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도 다음과 같은 진리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는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배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수용소에서는 항상 선택을 해야 했다. 매일같은, 매시간마다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 결정이란 당신으로부터 당신의 자아와 내적인 자유을 빼앗아가겠다고 위협하는 저 부당한 권력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말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것이었다.

그 결정은 당신이 보통 수감자와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자유와 존엄성을 포기하고 환경의 노리개가 되느냐 마느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었다.

(중략)결국 최종적으로 분석을 해 보면 그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근본적으로는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강제수용소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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