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 말하지만 나는 간첩이 아니다!"
1981년 세 자녀를 둔 36살의 젊은 아버지는 '간첩'의 누명을 쓰고 모진 고문 끝에 '간첩'이라고 허위 자백을 했다. 그리고 18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아내에게마저 간첩으로 의심받던 세월…. 옥살이가 끝난 뒤에도 상처는 사라지지 않았다.
'진도가족간첩사건'의 주인공, 박동운(56)씨의 한(恨) 맺힌 절규가 12일 국회에 울려 퍼졌다. 여전히 국보법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듯 울분과 슬픔이 가득 찬 그의 목소리는 지켜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저미게 했다.
"'간첩'이라는 낙인으로 세상에서 격리된 고통이 더 컸다"
이날 오후 2시부터 3시간여 동안 국회도서관 지하대강당에서는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와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 최재천·임종인 열린우리당 의원 공동 주최로 국가보안법(이하 국보법) 청문회가 열렸다.
이번 청문회는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국가보안법을 진단하다'라는 다소 이색적인 제목을 달고 열렸으며, 실제 조작간첩 사건으로 국보법의 피해를 입은 박동운씨와 허현씨가 증언대에 올라 눈길을 끌었다.
청문회의 사회는 송호창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변호사가 맡았고, 청문관으로 최재천·임종인 의원과 정혜신 박사(정신과 전문의)가 나섰다. 방청석에는 김혜경 민주노동당 대표와 민가협 관계자들 및 천주교인권위원회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등 국보법 폐지에 관심있는 150여명이 참석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
특히 청문회 증인으로 올라온 두 사람의 증언과 주최 측이 준비한 영상물(98년 KBS <추적 60분>의 관련 내용 방영분) 등은 국민의 머리 속에 각인된 레드콤플렉스와 국가권력으로부터 조작, 억압당하는 한 가정의 파멸 과정을 자세히 보여주었다.
이날 청문회에서는 무엇보다 '국보법'의 어두운 그림자가 여전히 우리 사회에 남아있고, 그 상처가 완전히 치유되지 못했음을 볼 수 있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이 땅에서 태어나고 싶지 않다"
박동운씨는 '이제 자유의 몸이 됐으나 이 나라에 대해서 어떤 기분이 드는가'라는 질문에 "36살에 안기부에 들어가 56살의 반 노인이 됐다"며 "고문을 당해 몸도 아프고 가족도 잃었고, 진실을 규명한다고 해도 잃어버린 18년을 어떻게 보상받겠느냐"고 울분을 토했다.
이어 박씨는 "전두환과 노태우 정권이 어떻게 했는지 아내마저 나를 간첩으로 의심하게 했다"며 "아내가 미운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만든 국보법과 전두환·노태우, 이들에게 분노를 느낀다"고 말하며 흐느꼈다.
김씨와 함께 '간첩'의 누명을 쓴 허현씨는 "60일 동안 일곱 여덟번은 죽었다 깨어나는 별의별 상상도 못하는 끔찍한 고문을 받으며 살아났다"며 "집행유예로 풀려난 이후 '간첩'이라는 낙인이 찍혀 주변 친척이며, 마을 사람들,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그 고통이 더 컸다"고 말했다.
이어 허씨는 "다시 태어난다면 이 땅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고, 살고 싶지도 않다"며 증언을 하는 동안 고문의 고통이 되살아난 듯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일반인들조차 얽매일 수 있는 간첩 사건 터져야 통치하기 쉽다"
정혜신 박사는 이들의 증언을 들은 뒤 "우리가 살았던 시절은 간첩이 와도 걱정이고 안 와도 걱정이었다"며, 얼마 전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방영됐던 '수지김 간첩조작사건'을 정권 유지를 위해 '간첩이 안 오면 간첩을 만들어낸 사건'의 사례로 들었다.
<제5공화국> 자료 화면을 본 박씨는 "국민이 정부를 무섭게 봐야 해, 졸로 봐서는 안돼. 일반인들조차 얽매일 수 있는 간첩 사건이 터져야 통치하기 쉽다"라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덕화 분)의 대사를 인용하며, "당시 내 가족 상황과 너무나 비슷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나는 간첩이 아니다"며 북받쳐 오르는 울분을 토했다.
이어 정 박사는 "가장 권위있고 강력한 힘을 가진 국가라는 공권력의 힘이 자식과 부인까지도 그를 '빨갱이'로 믿게 만들었다"며 "우리나라에서 '빨갱이' 낙인은 천형이 아닌가"라고 개탄했다.
| | | '사이코패스'란? | | | | '사이코패스'란 정신병환자란 의미로 반사회적 성격의 소유자를 말한다.
겉으로는 일상생활도 잘하고 멀쩡해보여 심지어 가족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자제심·양심·도덕성 등 통제 기제가 미약해 순간적인 충동으로 반사회적 행위를 저지른다. 연쇄살인범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 | | | |
특히 정 박사는 "그 동안 대한민국의 국가공권력은 '싸이코패스(psychopath)'와 다를 바 없다"며 진단했다. 덧붙여 그는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대한민국사'의 내용을 인용해 "군사독재의 입장에서 정국이나 입장이 어려울 때 간첩 사건을 퍼뜨린다는 공식이야 변함이 없지만, 이런 큰 목표가 아니더라도 진실은 꾸준히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정 박사는 이어 "국보법이 한 인간의 삶을 극도로 고립시키고 지금껏 진행되는 현재진행형"이라며 "이번 정기국회에서는 꼭 국보법이 없어지길 희망한다"고 말을 맺었다.
한편 김혜경 민주노동당 대표는 이날 청문회 시작 전에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웰컴투 동막골'이란 영화는 국보법 완전폐지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안 보는 것이 좋겠다"며 "남과 북의 군인들이 강원도 산골의 순수한 마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연합작전을 펼치는 것이야 말로 국보법이란 실정법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인사말을 꺼냈다.
이어 김 대표는 "국보법은 영화를 본 600만명을 범법자로 만들 수 있고 모든 국민이 재미있다는 그 영화를 이적표현물로 만들 수 있다"며 "오늘 청문회는 국보법이 한사람의 생명과 인권을 철저히 유린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이야기"라고 말했다.
| | | "국보법 '악마성' 드러내 우리시대가 낳은 상처 치유" | | | [평가] 국보법 청문회 사회자 및 청문관의 평가 | | | | 12일 국보법 청문회는 국가의 폭력이 어떻게 한 사람을 풍비박산내고 나아가 가족과 그 주변까지 얼마나 고통스럽게 만들었는지를 느낄 수 있는 자리였다.
이날 청문회에서 사회자였던 송호창 변호사와 청문관이었던 열린우리당의 임종인, 최재천 의원들은 이번 청문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송호창 민변 변호사] "국보법은 헌법이 정하는 기본원칙에 반하는 위헌적인 법으로써 한 마디로 집약하면 '악법'이다.
국보법을 폐지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가 낳은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과정에 불과하다. 국보법의 고통과 잔인함, 악마성을 드러냄을 통해 우리 국민 모두가 알게 모르게 받아왔던 피해의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
그 출발은 국보법 폐지부터 시작해야겠다. 지금도 조작간첩이라 의심되고 확신을 갖고 주장하는 사람만도 83명으로 유사한 조작간첩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것이 1차적 출발이다. 재심을 통해서라도 해결돼야 한다."
[임종인 열린우리당 의원] "국보법은 두 사람의 마음에 못을 박고 한을 맺게 했다. 법의 문제이기 전에, 고문을 자행한 (안기부) 사람들은 무슨 권한으로 그랬을까?
이를 위해 국가뿐만 아니라 개인도 책임지기 위해서 노무현 대통령이 밝힌 바와 같이 '과거사 시효중단'를 해야 하고, 국보법 피해자에 대한 명예회복 및 진상규명, 보상이 완벽히 실시해야 한다.
또 조작의 주체였던 국정원, 검찰, 법원의 '과거사' 반성이 이뤄져야 한다. 제일 문제는 법원, 검찰, 안기부 순으로 법원이 영장을 발부하지 않았다면, 검찰이 안기부를 막아줬어야 한다. 물리적이 폭력을 가한 안기부 직원보다 '법복'에 숨어 폭력을 합법화해준 판사와 검사가 더 문제다."
[최재천 열린우리당 의원] "이 자리는 국보법 폐지 국민연대분들의 고생으로 만들어졌다. 그들의 노력이 국보법 폐지의 동력이 되고 발전기를 돌려 빛을 낸다. 이번 공청회는 박동운, 허현씨의 상처가 치유되는 제의적인 행사이자, 과거청산의 일반원칙인 관계자 처벌·재심·명예회복 등을 다시한번 확인하는 자리였다. 또 국보법 폐지를 위해 열과 성을 다하는 사람들이 다시한번 신발 끈을 매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 국회의원으로써 임무가 중하고 자리가 무겁다고 느낀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