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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과 시댁은 위 아래 동네에 있다. 우리집이 산동네고 시댁은 양지마을이라고 하는 조용한 마을에 있다. 사진은 우리집과 시댁 사이에 있는 저수지인데 경치가 그만이다. 올 추석에는 이곳 둑에서 식구들이 함께 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빌어야겠다.
우리집과 시댁은 위 아래 동네에 있다. 우리집이 산동네고 시댁은 양지마을이라고 하는 조용한 마을에 있다. 사진은 우리집과 시댁 사이에 있는 저수지인데 경치가 그만이다. 올 추석에는 이곳 둑에서 식구들이 함께 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빌어야겠다. ⓒ 권미강
4대 독자 외동 며느리. 나의 또 다른 정체성이다. 종가댁은 아니라고 해도 한국 사회의 며느리들이라면 그 부담감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15년 전 이곳 경북 칠곡으로 시집 왔을 때가 생각난다. 남편과 연애를 넘어선 열애 끝에 올린 결혼이었기에 어떤 힘겨움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어쨌든 난 서울에서 산 서울 새색시였다. 정서도 다르고 말씨도 다른 경상북도에서 살아내기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런 내가 드디어 그 무시무시하다는 명절을 맞았다. 예의 바르고 '착한' 며느리로서 본분을 다하리라 맘 속 깊이 다짐했다. 하지만 시댁에서 처음 맞는 명절은 거의 고문 수준이었다.

시장 보는 거나 나물 다듬고 과일, 전거리 챙기는 일이야 어머니 하시는 대로 거들면 됐다. 하지만 하루 종일 한자리에 앉아서 전 부치는 일은 정말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그런데 벌써 15년째다). 진동하는 기름 냄새에 코는 마비될 지경이었고 부추전에 배추전까지 널찍하고 보기 좋게 전을 부치기란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허리 한 번 펴지 못하고 꼼짝 않고 앉아 있어야 했으니….

점심쯤은 거를 수도 있으련만 꼬박꼬박 점심상까지 챙기고 설거지까지 할 때는 정말 어른들 앞에서 표시도 못 내고 여간 속상한 게 아니었다. 그런 내 상황을 눈치 채셨는지 어머니는 "우리야 그냥 전 몇 쪼가리 집어 먹음 되지만 남자들이야 요기될 것을 줘야 안 되것나" 하셨다.

'전 인생'이나 '며느리 인생'이나 매한가지

추석이면 빠질 수 없는 송편. 하지만 송편 빚기도 만만치 않은 노동이다.
추석이면 빠질 수 없는 송편. 하지만 송편 빚기도 만만치 않은 노동이다. ⓒ 이종찬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어머니는 차례 음식을 조금씩 줄이셨다. 제사 음식도 마찬가지였는데 잘 먹지 않는 음식은 없애고 꼭 써야 하는 것만 조금씩 장만하셨다(그래도 어린 새색시를 질리게 했던 전은 여전히 두세 소쿠리씩 마련하신다).

어머니는 항상 이렇게 말씀하신다.

"야야, 그래도 니는 참 편해졌데이. 옛날에는 지금처럼 싱크대가 있나 이런 큰 전기 후라이팬이 있나. 혼자서 불 지피고 부엌으로 마당으로 허리 한 번 못 펴고 음식 장만한다고 내 마이 고생했데이."

명절 음식 중에서 가장 손을 많이 타는 건 전이다. 하지만 차례상에 올라갈 때는 밤이나 대추처럼 한 자리만 차지한다. 나는 상을 차릴 때마다 '전 인생'이나 '며느리 인생'이나 똑같다는 생각을 한다. 밀가루에 계란까지 온 몸을 단장하고 뜨거운 기름에 이리 뒤집히고 저리 뒤집히다가도 결국에는 한 그릇에 포개져 조상님께 선보여지는 전이나 실컷 일하고도 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례상에 서지도 못하는 며느리 인생이나 비슷하지 않은가.

집안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시댁에서는 성이 같은 딸들은 차례를 지내도 다른 성씨의 며느리(그래 봤자 어머니와 나랑 둘이다)들은 부엌에서 올릴 음식을 준비하며 물끄러미 차례 지내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한다.

나도 명절에 친정에 가고 싶다

그럴 때는 어머니와 내가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동지가 된 것 같다. 그래도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일까. 명절은 내가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면서 동시에 섭섭함을 느끼는 때이기도 하다. 그 미묘한 파열을 내는 존재는 바로 시누이들이다.

나에게는 위로 큰 시누이 한 분과 아래로 3명의 시누이가 있는데 지금은 모두 결혼해 아이까지 두었을 뿐더러 혹여 내가 소외감이라도 느낄까 맘을 많이 써 준다. 그런 내 시누이들은 명절이면 시댁에 갔다가도 꼭 친정에 들른다. 결혼한 딸들을 반갑게 반기고 오순도순 얘기를 나누며 먹을 것을 챙기는 어머니 모습을 보면 한편으로는 부러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가슴 한구석이 시리다.

나도 명절이 되면 고향에 가고 싶고 친정 엄마도 보고 싶다. 하지만 외동 며느리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처음에는 친정에 가고 싶다고 남편에게 조르기도 했다. 그때마다 남편은 명절날 친정이 있는 충남 서천으로 가기에는 너무 멀고 힘들다는 이유를 댔다. 그나마 한다는 말이 명절을 피해서 다녀오는 게 어떻겠냐는 것이었는데 그마저도 직장 일 때문에 흐지부지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에게 별 다른 말을 하지 않는 그저 착한 며느리로만 살아 왔다. 결혼 후 몇 년 동안 겪어온 어머니의 시어머니 즉, 시할머니께서는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은 꼭 해야만 하는, 상당히 '본능적인' 분이셨다. 시할머니의 성격을 받아 주는 것은 고스란히 어머니의 몫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참 너그럽고 다정한 분인데도 며느리인 어머니에게만은 유독 혹독하게 하시는 듯했다. 전통적인 가부장적 집안에서 온갖 풍상을 겪어온 시어머니가 같은 여자로서 너무 애처롭고 안타까웠기에 그냥 속으로만 삭혔다.

"어머니, 우리도 맞춤상..." "뭔 소리 하노?"

맞춤 차례상. 이제는 시대가 변해 조상님 드실 음식도 주문하는 세상이 왔다.
맞춤 차례상. 이제는 시대가 변해 조상님 드실 음식도 주문하는 세상이 왔다. ⓒ 이종찬
지난 해 신문 지면에서 맞춤 차례상 기사를 봤다. 명절은 그렇다 쳐도 시시때때로 있는 제사 때문에 퇴근하자마자 팔 걷어붙이고 음식 만드는 게 여간 힘들지 않았기에 그 기사에 눈이 번쩍 띄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꺼냈지만 돌아온 대답은 예상대로 완강했다.

"야가 뭔 소리하노. 조상님께 올릴 음식을 우얀다꼬? 여자가 둘 있는데 사서 하다이."

결국 나는 본전도 못 찾고 사태를 수습하느라 혼쭐이 났다. 그런데 사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역전됐다. 그 일이 있어 얼마 되지 않아 갓 결혼한 시누이가 처음으로 제사를 모시게 됐는데 바로 맞춤 제사상을 주문한 것이다. 아이를 가진 터라 몸도 무거웠고 일찍 돌아가신 시어머니 제사여서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었던 시누이는 '현명하게도' 맞춤상으로 해결한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께서는 "뭐 할 수 없지, 지가 언제 음식 한번 해 봤나. 그래라도 제사 올려야 안 되겠나"하시고는 더 이상 말씀이 없으셨다. 물론 상황이 다르긴 했지만 이게 딸과 며느리의 차이구나 생각하니 기분이 참 묘했다.

그 일 때문일까. 올해 설에는 나를 친정에 보내 주라는 시누이들의 간청으로 시어머니께서 친정행을 허락하는 일대 사건이 있었다. 시누이들이 자기들은 명절마다 친정 오는데 올케는 친정도 못가서 친정 오기가 민망하다며 어머니와 남편에게 강력 건의한 것이다. 올해 설날 오후 난 결혼 후 처음으로 명절날 친정에 다녀왔다.

나는 이번 추석에도 직접 전 부치고 송편 빚고 난 후에 시어머니에게 적극 공세를 펼칠 생각이다.

"어머니, 오후에 친정 보내주세요, 네?"

마흔이 된 늙은 며느리의 그런 교태(?)를 시어머니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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