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던 <안녕, 프란체스카> 시즌3의 막이 올랐다. 그러나 기다림의 갈증을 풀어주지 못했다. 시즌 1과 2에서 느꼈던 그런 신선한 느낌과 채워짐이 없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며 '아'하고 탄성을 내지르는 자각의 순간이 없었고, 따뜻한 피가 흐르는 '두일' 같은 사람다운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시즌3은 1편과 2편이 갖고 있던 열혈 마니아의 욕구도 반영하면서 새로운 시청자도 끌어들인다는 계획 하에 출발했다. 그래서 전편의 엽기 코드는 그대로 가고 있다. 다양한 시청자 확보를 위해 '일용엄니'로 중장년층에게 익숙한 김수미씨와 배역과 비슷한 연배의 김도향씨를 투입해 돈과 여자를 밝히는 할아버지와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여자이고 싶어 하는 할머니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이게 얼마나 모순인지 기다리던 3편을 보고서 깨달았다. 왜냐면 주변에서 나이가 좀 드신 분들한테 "프란체스카 너무 재미있지요?"하고 물었더니 "애들 장난도 아니고 도대체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는 대답이 날아왔다. 아직 20대인 동생 같은 경우에는 텔레비전 프로 중 가장 재미있다는 열혈 마니아다. 물론 나도 이 프로를 가장 좋아한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세대보다는 젊은 사람들한테서 이런 엽기 코드가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보수적인 세대는 이 프로를 보려고 하다가도 엽기적인 느낌과 황당한 시츄에이션에서 검문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 세대는 스토리라인이 충실하고 많이 봐왔던 것에 익숙한 세대다. 그러므로 새로운 느낌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예를 들면 유머라면 심형래 식의 오버연기에 익숙한 세대인데 <프란체스카>의 유머는 냉소와 절제가 미덕이니 그 상황을 유머로 인식하기 어려운 것이다. 유머가 아니라면 이야기여야 하는데 또 프란체스카가 스토리보다는 상황의 느낌에 집중하는 편이니 이래저래 코드가 맞지 않다.
두 마리의 토기를 잡으려고 했던 시즌3의 제작진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한 마리 토끼인 열혈 마니아 중 한 명인 나도 시즌 1과 2에 보냈던 지지를 시즌3에 보내는 데 주저하게 된다. 왜냐면 내가 전편을 좋아했던 것은 전편에는 두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일은 우리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우리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고 우리의 욕구를 반영한 캐릭터라고 볼 수가 있다.
그런데 시즌3에선 두일의 자리가 주인집 할아버지로 메워졌다. 흡혈귀와 인간의 가교역할을 한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프란체스카를 좋아한다는 측면에서도 두일을 좋아했던 이들이 과연 주인집 할아버지를 이해하고 공감대를 느낄 수가 있을까? 주인집 할아버지가 아니더라도 공감대를 느낄만한 캐릭터가 없다.
사실 이 시트콤이 열혈마니아를 거느릴 수 있었던 것도 두일에게서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고, 또 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두일과 같은 세대는 우리나라가 어느 정도 가난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성장한 세대고, 이전 세대는 절대적 가난을 경험한 세대다. 두일은 비록 가난한 노총각이라고는 하지만 근본적인 가난과는 차이가 있다. 먹는 문제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세대기에 상대적 가난을 느끼는 세대다.
절대적 가난과 상대적 가난은 근본적으로 차이점이 있고, 의식이나 가치관에도 깊은 영향을 주기에 할아버지와 두일의 욕망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두일의 욕망이 좀 더 복잡한 데 반해 가난한 세대를 대표하는 할아버지의 욕망은 좀 더 단순하다.
할아버지는 흉가를 운영하며 돈을 벌고자 새로운 가정을 들여 사람들이 죽어나가면 보증금을 가로챈다는, 돈에 대한 집착을 보인다. 할아버지의 이미지는 중요한 걸 숨겨두는 금고의 이미지와 매우 어울린다. 그리고 프란체스카가 빨래할 때 몰래 다리를 훔쳐본다거나, 밤에 방으로 들어가 복숭아 뼈를 만진다거나 하는 행동을 보면 프란체스카를 사랑한다기보다는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 같다.
그러나 두일은 어떠했는가? 프란체스카가 왜 자신을 물었는가, 그 이유에 집착했다. 성적인 대상 보다는 애정을 확인 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걸, 중요한 존재라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다. 프란체스카와 더불어 따뜻한 가정을 이루고 싶었던 게 두일의 소망이었다. 즉 두일의 욕구는 소속과 애정의 욕구기에 끊임없이 프란체스카와 다른 가족으로부터 애정을 느끼고 싶어 했다.
두일에게 공감대를 느끼고, 두일에게서 자신을 발견했던 시청자들에게 할아버지 캐릭터는 낯선 존재다. 그리고 이 할아버지 캐릭터는 캐릭터 자체만 놓고 봐도 식상하거나 엉뚱하다. TV문학관에서 여자 밝히면서 아주 인색한 할아버지들을 많이 봐왔었는데 그렇게 식상한 느낌 위에다 마루 인형을 갖고 논다는 설정은 도무지 조화를 이루지를 못하고, 억지스런 느낌을 준다.
그리고 여자이고자 하는 할머니 캐릭터는 주인 여자였던 박희진 캐릭터와 다소 비교되는데, 그런데 우리시대 다수의 할머니가 정말로 여자이고 싶어 할까? 할머니의 자리보다 여자의 자리를 더 바라는 사회적 열망이 받침이 돼야 이 캐릭터가 살아날 수가 있는데, 아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박희진 캐릭터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노처녀가 많기 때문이었다. 전문직에 종사하며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된 여자들에게서 결여된 것은 젊음이고, 그래서 켠과 같은 애송이를 좋아하는 건 당연한 논리다. 이런 이해가 있었기에 이 캐릭터가 공감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안녕, 프란체스카> 시즌3에는 사회와 사람에 대한 이해가 없이 머릿속에 만들어진 상황만 있는 것 같다. 과거에는 이런 상황서 이렇게 하면 웃기겠지, 하고 웃기는 표정을 짓거나 뒤로 나자빠지면 웃었다. 허나 지금의 웃음은 우리 사회와 우리 자신을 보여주는 것으로부터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시작한다. 시즌3에는 따뜻한 피가 흐르는 인간은 없고, 피를 마시는 엽기적인 느낌의 흡혈귀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