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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날보다 일찍 퇴근한 남편이 산책을 가자고 했다. 평소 산책할 시간이 부족하고, 아직 해가 남아있어 걸어 다니기에 좋은 시간이었다. 밖으로 나왔을 때 당연히 하천이 내려다보이는 둑길로 갈 줄 알았는데 방향을 시내로 잡고 있었다.
"왜? 시내 구경하게?"
"레코드 가게 한 번 가보고 싶어서."
평소 음악을 좋아했지만 직접 테이프든 CD든 구입하기 위해 인터넷을 돌아다닌다거나 레코드 가게 갈 만큼은 아니었는데 음악이 몹시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우리가 처음 가게에 들어갔을 때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 양양에서 하나밖에 없는 레코드 가게인데 독점상권임에도 불구하고 가게가 너무 작은 것에 놀랐고 또 하나는 가게에 소장된 테이프 껍질이 하나같이 색이 바랬다는 것에 놀랐다. 찾는 이가 많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요즘은 인터넷서 듣고 싶은 음악을 쉽게 찾아들을 수 있는데 촌스럽게 CD도 아니고, 테이프를 찾겠는가.
주인 아저씨는 좀 나이가 들어보였는데 텔레비전을 보다가 우리가 들어서자 일어서긴 했지만 별로 반기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가 나타난 게 그의 TV시청을 방해한 건 아닌가, 해서 테이프를 둘러보면서도 마음이 쓰였다.
최신곡보다는 옛날 노래가 많았다. 옛날에 좋아했던 '스모키' 테이프도 보였지만 구미가 당기지 않고, 컨츄리송이 괜찮을 것 같아 아저씨에게 물었더니 아저씨는 찾아보다가 우리나라 포크송 모음집은 있지만 그건 없다고 했다. 사실은 미국 방송에서 들었던 블루그래스가 듣고 싶었지만 좀더 대중적인 컨츄리송을 찾았는데 그것도 없다니 딱히 살만한 게 없었다.
남편도 열심히 고르고는 있는데 마땅한 것을 찾지 못한 것 같았다. 마침내 남편은 아저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저씨, 뭐 좋은 거 없어요?"
"어떤 음악을 찾는데요?"
"지금 제가 37살인데 우리가 학창 시절에 들었던 팝송 있나요?"
아저씨는 영화음악이나 드라마 삽입곡, CF배경음악으로 쓰였던 팝송들을 모아놓은 테이프 두 개가 한 묶음인 모음집을 추천해줬다. 남편은 노래 제목들을 살펴보더니 좋다고 했다. 흔쾌히 테이프 값을 지불하는데 아저씨의 강의가 시작됐다.
손님이 없다가 마침 한 가족이 들어와서 열심히 음악을 찾는 모습이 좋아보였는지 아저씨는 인생의 의미에 관한 강연을 하셨다. 나는 테이프를 찾는 척하면서 강연을 들었고, 남편은 아저씨와 마주 서서 진진하게 들었다. 애들은 가게 앞에서 장난치고 있었다. 어느새 텔레비전은 꺼져있고, 잘 모르는 조용한 팝송이 흐르고 있었다.
"지금 내 나이가 59살이에요."
"그렇게 안 보이시는 데요. 저의 부모님이랑 비슷한 연배시네요."
남편은 예의상 젊어보인다는 인사를 했다.
"젊었을 때는 몰랐어요. 50이 넘으니까 이제야 인생이 뭔지 좀 알 것 같아요. 옛날에는 애들이 저렇게 까불면 귀찮다는 생각하고, 빨리 갔으면 했는데 지금은 애들이 좋아 보여요. 저렇게 즐겁게 웃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우리 애들을 가리키며 말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속으로 우리 애들이 떠든다고 빗대서 저런 말을 하는가 하는 생각도 했다.
"김도향이 부른 노래 중에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이런 노래가 있는데, '바보처럼 살았다'는 말이 진짜 바보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인생을 헛살았다는 말이지요. 정말 중요한 게 행복하게 사는 건데, 돈이니 출세니 이런 것만 좇아서 살았다는 뜻이에요. 그 전에는 정말 몰랐는데 이 나이가 되니까 진짜 중요한 건 행복이라는 걸 알겠어요. 아직은 젊어서 내 말 뜻을 잘 모를 거예요. 이제 나이는 훌쩍 먹었고, 젊음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그 시간을 헛되게 보낸 것 같아서 시간이 정말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간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 같았다. 20대는 20대의 즐거움이 있고, 그 시기에 누릴 수 있는 건 누리면서 인생을 즐겨야 하고, 또 30대엔 30대의 행복을 찾아가며 살았어야 했는데 그저 아등바등 주위를 돌아볼 틈이 없이 살았다는 뜻이었다.
"정말 인생의 참맛은 50이 넘어야 알아요."
그런데 어떤 이는 30이 되면 인생이 보인다고 하고, 이 나이에 인생을 알 것 같다고 했다. 나 또한 30이 넘으니까 20대와는 확실히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짐을 느꼈는데 아저씨 말에 의하면 50이 넘어야 인생을 제대로 안다고 한다. 모두 자기 나이를 커트라인으로 정하는 것 같았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그게 맞는 모양이다. 남편은 가을바람이 불자 음악을 들으면서 자신의 딱딱한 일상에서 부족한 낭만을 채우고자 열심히 음악을 찾았다. 그리고 레코드 가게 아저씨는 또 아저씨대로 가을바람이 가슴 한 편을 서늘하게 했는지 처음 본 사람에게 인생강의까지 한다. 가을바람은 남자를 감상적으로 만드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