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통 끝에 6자회담 공동성명이 채택되었지만, 성명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경수로를 둘러싸고 북한과 미국 사이의 신경전이 격화되고 있다. 공동성명에서는 "적절한 시점에 논의"하기로 했는데, 그 적절한 시점을 놓고 북미 사이에 해석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6자 회담 미국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는 공동성명 채택 직후 기자회견을 통해 "경수로 논의의 적절한 시점은 북한이 핵무기와 핵 프로그램을 모두 없애고,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복귀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조치를 받을 때"라고 강조했다. '선 북핵 폐기, 후 경수로 논의'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자 북한의 외무성 대변인은 20일 "미국이 대북 신뢰 조성의 기초로 되는 경수로를 제공하는 즉시 NPT에 복귀하고 IAEA와 담보협정을 체결하고 이행할 것"이라고 받아쳤다. '선 경수로 제공, 후 핵 포기' 입장을 드러낸 것이다.
이처럼 공동성명 채택 합의 하루만에 핵심 쟁점이었던 경수로 문제를 둘러싸고 북미간의 공방이 벌어짐에 따라, '경수로가 공동성명 이행의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다. 공동성명에서 모호한 표현을 통해 한숨을 돌리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북한과 미국이 아전인수(我田引水) 식으로 "적절한 시점"을 해석하고 나옴으로써 11월 초로 예정된 5차 6자회담에서 이 문제가 또 다시 핵심 쟁점으로 부상할 것임으로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경수로가 먼저냐, 핵폐기가 먼저냐'는 논란은 북핵 폐기 절차와 이에 대한 상응조치의 선후(先後) 문제의 복잡성을 보여주는 예고편이라고 할 수 있다. 공동성명에는 여러 가지 문제 해결의 원칙과 최종 목표가 담겨 있지만, 이들을 어떻게 동시적으로 연계해서 해결할 것인가는 담겨 있지 않다. 다만 "6자는 '공약 대 공약', '행동 대 행동' 원칙에 입각하여 단계적 방식으로 상기 합의의 이행을 위해 상호 조율된 조치를 취할 것을 합의"했다.
'동시 행동': 북한의 NPT 복귀와 북미 원자력 협정 체결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는 것은 경수로 문제로 인해 5차 6자회담이 지연되거나, 열리더라도 또 다시 서로의 입장 차이만 확인하고 이렇다할 성과 없이 끝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미국이 주장하는 것처럼 북한이 핵을 완전히 포기한 이후에 경수로 제공 문제를 논의한다는 것은 핵 폐기를 완료하는데 수년은 족히 걸릴 것이라는 점에서 현실성이 없다. 더구나 미국은 북핵 폐기 이후에 경수로 사업을 보장하겠다는 입장도 아니다.
북한의 주장도 현실성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경수로를 완공하는데 최소 5년 이상은 걸릴텐데, 경수로가 제공된 이후에 NPT에 복귀하겠다는 것은 북한의 핵 포기 의지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북미 사이의 근본적인 입장 차이를 해소하고 5차 6자회담에서 이행 계획에 합의해 1단계 동시 행동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절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절충안의 방향은 '동시 행동'이다. 즉 북한의 NPT 복귀와 경수로 제공을 '선후'의 관점에서 접근할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 행동에는 어려움이 있다. 북한이 NPT에 복귀하고 IAEA 사찰을 수용하는 것은 '행동'으로서의 의미를 갖지만, 미국이 경수로 제공을 약속하더라도 이는 행동이라기보다는 '공약' 수준에 해당되어 양측 사이의 '불일치'의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경수로 절대 불가'를 고수해온 부시 행정부가 경수로를 주고받기식 협상의 대상으로 삼을 것인지도 불확실하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행동 대 행동' 차원에서 이 문제를 풀 필요가 있다. 즉, 북한이 NPT에 복귀하고 IAEA 사찰을 수용하는 것과 미국이 북한에 경수로 제공을 보장한다는 차원에서 북한과 원자력 협정을 체결하는 것을 동시에 이행하는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경수로 사업에 대한 미 의회의 부정적인 인식을 고려할 때, 의회의 승인이 필요한 원자력 협정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부시 행정부의 의지이다. 공화당이 미 의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수로 사업은 민주당 정권 때의 약속이기 때문에 부시 행정부가 의회를 설득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KEDO를 동북아에너지협력기구로
경수로 문제를 포함해 북한의 에너지난을 해소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할 기구의 창설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북핵 문제 해결의 틀이 6자회담으로 짜여진 만큼 새로운 기구가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제네바 합의의 산물인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확대·개편해 '동북아 에너지 협력기구(Northeast Asian Energy Cooperation Organization : NAECO)'를 창설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기구에는 KEDO 회원국인 한국, 미국, 일본, 유럽연합(EU) 이외에도 6자회담 참가국인 북한, 중국, 러시아를 회원국으로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 제안은 중유를 비롯한 대북 에너지 제공 주체로 비(非) KEDO 회원국인 중국과 러시아가 포함되었고, 제네바 합의가 사실상 파기됨에 따라 KEDO의 위상 정립이 필요하다는 현실적인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아울러 에너지를 둘러싼 동북아 국가들의 각축전이 치열해지고 있고, 에너지 사용량의 폭발적인 증가로 인한 환경 문제도 심각해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향후 에너지 협력 문제가 중요한 현안으로 대두될 수 있다는 판단도 포함되어 있다.
실제로 동북아에너지협력기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양하고도 중요하다. 중유 제공의 실행 주체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논란이 되고 있는 경수로 문제의 합리적인 해결 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경수로에 집착하는 이유는 경수로가 미국의 구체적인 대북 신뢰 조치의 일환이자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는 명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전력수급체계를 다양화·안정화할 필요가 있고, 특히 400만톤 이상의 가용 우라늄이 매장되어 있다는 현실적인 판단도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라늄 농축 시설의 이용 권리를 북한에게 허용할 경우, 핵무기 제조로 전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될 수 있다. 이는 한반도 비핵화 선언에 위배되기도 한다. 따라서 동북아에너지개발기구가 북한의 우라늄 광산을 이용해 경수로 발전용 원료를 제공하고 경수로 운영권을 갖는다면, 경수로 문제 해결의 기초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렇게 되면 경수로는 IAEA 감시와 함께 동북아에너지협력기구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됨에 따라 핵무기 제조용으로 전용될 수 있는 소지를 완전히 없앨 수 있게 된다.
결국 위와 같은 절충안을 포함해 해법을 마련해 관철시켜야 할 몫은 한국과 중국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두 나라가 공동성명 채택 과정에서 '창조적 모호성'을 발휘해 큰 관문을 통과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면, 이제는 구체적인 해법을 가지고 북한과 미국을 설득해야 할 시점이라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CNB뉴스(cnbnews.com)에도 송고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