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조선에 연재된 14인의 원로급 시인 이야기. 김광림, 김남조, 김종길, 김춘수, 박성룡, 신경림, 조병화 등 70, 80에 이르는 노시인들의 문학 세계와 삶을 인터뷰를 통해 실제적으로 접근한 책이다.
시인은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앙드레 브르통이 말했는데, 이는 흘러가는 일상과 자연에서 시인이야말로 비범한 것 혹은 진실을 발견하고 그것을 알려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선택은 물론 신(神)이 하는 것이다.
이 책은 <월간조선사>의 도움을 받아 언론인이자 시인인 작가 이유경(李裕憬)이 우리 나라의 원로 시인 14명을 직접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중심으로 연재한 글을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손에 넣게 된 계기부터 말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이 책을 일면식도 없는 경상도의 어느 독자에게서 선물로 받았다. 교육계에 종사하시다가 퇴직한 분이셨는데 지난 가을에 지역 신문에서 내 이야기를 읽고 편지와 함께 보내주신 책이어서 감동이 특별한 책이었다. 나 역시 시를 좋아하지만 그 높은 벽을 넘지 못하고 아직도 주변에서 서성거리며 시에 대한 짝사랑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야말로 '선택받아야 하는' 그 숙명적 택함을 납작 업드려 기다리며 구도의 길을 가는 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 문학을 '목숨 걸어도 좋은 나무'라고 했다지만, 아직도 나는 그 싹이 돋을 기미조차 없어 밤을 괴롭히고 책을 귀찮게 하는 삶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런 갈증에 목마른 내게 이 책은 나침반의 구실을 해주고 있다. 문학에 갈증을 느끼는 독자라면 곁에 놓고 조석으로 친구해도 좋을 만큼 든든한 자리를 내준다. 문학의 갈증을 풀지 못해 날마다 <오마이뉴스>에 생쥐처럼 들락거리며 세상에서 주은 곡식 낟알 몇 개를 물어나르며 그나마 감질나는 목마름을 아쉽게나마 연명해 가는 내 일상이 있어 숨을 쉬고 산다고 할 수 있다.
직업과 취미 사이에서 오는 갈등과 화해의 악수를 나누고 사는 지금, 내 취미를 전업으로 삼을 수 없는 밑바닥이 보이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그래도 한가닥 희망을 버리지 못한 때문이다.
이 책에는 그런 희망의 등불들이 번득인다. 그런 점에서 나는 시인은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명제에 결코 동의하지 않으려 한다. 황무지를 개척하여 옥토로 가꾸는 농부처럼 문학이라는 나무도 처음부터 큰 나무로 태어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본론으로 들어가면, 일본과 대만에서 더 유명하다는 김광림의 은둔 생활과 4대 시 잡지 중 3개를 창간한 그의 열정을 만날 수 있다. 문학과 먼 일상 속에서 책 속에서 만나는 시인의 허연 백발이 주는 멋진 풍모만으로도 그가 시의 기둥임을 말하고 있다.
70을 넘기고 났더니 비로소 씨 쓰는 게 두렵지 않다고 말하는 김남조 시인이 둘째로 등장한다. 이 책의 저자가 석달을 기다려 인터뷰를 할 수 있을 만큼 힘들었다는 후일담을 배경으로 고뇌의 늪을 깊이 깔고 있는 그녀의 시들은 기도의 시인이라 할만큼 비장하다.
그는 '옳은 말은 범람하되, 옳은 행위는 도무지 드물다'는 권두언으로 시작하는 <문학사상>9월호를 통하여 문학인이 지닌 언어의 지킴이 구실을 강조하고 있다. '말은 살아 있는 것이며 말해진 순간 말의 결과와 책임이 파생하므로 칼보다 더 무서움을 알고 검법을 익히듯 말을 닦아야 한다'고 말한다.
4개 국어로 시 쓰는 시인 김종길, 천사 된 아내에게 89편의 시를 써 바친 고 김춘수 시인을 비롯하여 박성룡, 성찬경, 신경림, 이형기, 허만하, 홍윤숙 시인을 비롯하여 모두 14명의 원로 시인들의 문학 인생이 잔잔히 그려져 있다. 이미 작고한 시인들이 현존하던 때에 편집, 출간된 책이라서 옆에서 이야기하듯 다가오는 친근함마저 안겨준다.
한꺼번에 읽기는 다소 무리일 듯 싶은 이 책의 중량감은 음식으로 치자면 간식보다는 주식에 가까우며 우리 체질에 맞는 쌀밥과 된장국을 먹는 듯한 포만감을 안겨준다. 백발이 성성한 노시인들이 손자 손녀의 손을 잡고 가까운 공원에 나가서 나들이하듯, 무겁고 질긴 이야기를 곰삭은 언어로 잘 풀어내어 들려준다.
이 시대의 거목으로 자리한 시인들이 내 방에서 내뿜는 오래 된 시어들은 어느 것 하나 세월의 늪에 깔려 뒤로 처지지 않고 시간이 갈수록 더 빛을 발하며 나를 불러 세운다.
가을에는 시인이 아니어도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 한다. 좀더 적극적으로 시인의 곁에 가서 그의 체취를 맡고 싶은 독자라면 망설임없이 다가 설 수 있으리라.
시만 있는 시집이 아니라 시인의 삶과 인생을 함께 만날 수 있으며, 한꺼번에 한 자리에서 보는 즐거움도 쏠쏠한 책이다. 이미 고인이 된 시인들이 생전에 쏟아놓은 진솔한 언어들이 행간마다 살아 있다.
덧붙이는 글 | 시를 좋아하는 독자들이 시인의 삶도 같이 알면 더 좋겠지요? 귀하게 얻은 책이라서 얼른 만나기 어려운 책이라서 함께 나누고 싶어 글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