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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고향의 저의 집은 탱자나무 울타리가 주변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봄이면 새순이 올라오는 탱자나무 울타리에도 하얗게 탱자꽃이 피어나고는 했습니다. 꼭 새끼손가락 크기 만한 연두색 애벌레가 제법 커다란 뿔을 자랑하면서 탱자나무 가지 위를 기어 다니고는 했는데, 그 애벌레가 호랑나비 애벌레였다는 것은 뒤늦게야 알았습니다.
노랗게 익어가는 탱자를 오랜만에 보게 되어 반가운 마음에 아들아이에게 저 열매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잘 모른다고 합니다. 아들아이는 아마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탱자에 대해서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조금 더 걷다보니 시멘트 벽돌담 밑으로 작은 꽃밭이 잘 가꾸어져 있습니다. 농사를 짓느라 많이 바빴을 터인데도 꽃밭을 가꾸어 놓은 부지런한 손길과 넉넉한 마음의 여유가 와 닿아서 담을 타고 지붕을 뒤덮은 호박넝쿨과 함께 카메라에 담아 보았습니다.
논의 벼가 노랗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멀리 언덕 가운데 부분에 어머님의 산소가 있습니다. 오른쪽의 높다란 둑 저편에는 저수지가 있습니다. 둑 밑의 길을 따라서 저희 가족들은 어머님을 만나러 갑니다.
저수지 둑 밑의 길옆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분홍빛의 들꽃이 여기저기 피어 있습니다. 수풀 속에서 누렇게 익어가는 호박도 탐스럽습니다.
드디어 어머님의 산소 앞에 도착했습니다. 가족들이 정성껏 벌초를 해 놓았기에 산소 주변이 말끔하게 정리정돈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어머님의 산소 위로는 어느새 풀이 자라 있습니다. 마치 어머님의 머리가 자라있는 듯한 모습입니다.
오른쪽 산소에 어머님께서 잠들어 계시고, 왼쪽 산소는 아버님의 가묘입니다. 언제인지 몰라도 어머님이 가신 길을 따라 아버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면 어머님과 나란히 사이좋게 잠이 드실 자리입니다. 어머님 산소 하나만 외롭게 있는 것보다 든든해 보입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는 자식들의 발걸음을 조금은 가볍게 해 줍니다.
이제 준비해 간 음식과 과일, 떡을 차려 놓습니다. 자식들은 다시 한번 술 한잔 따라 올리고 큰절을 올렸습니다. 집에서 차례를 지낼 때에 작은 며느리인 저는 그 모습을 바라만 보아야 했지만, 어머님의 산소에서는 저 혼자서 술 한 잔 따라 올릴 수 있는 기회도 주어졌습니다. 저 혼자 두 번 큰절을 올리는 짧은 순간에 그동안 어머님께 다하지 못한 많은 이야기를 마음으로 들려 드렸습니다.
성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길 옆에는 보랏빛의 방아꽃이 활짝 피어 있습니다. 어디서들 날아왔는지 많은 나비들의 화려한 날갯짓이 어지럽습니다. 방아잎은 장어국이나 추어탕을 끓일 때 넣어 먹으면 색다른 맛을 느끼게 해 줍니다. 그리고 부침개를 만들어 먹을 때에도 방아잎을 넣으면 그 맛이 정말 좋습니다.
성묘를 가는 길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담장 위의 풍경이 정겹습니다. 담장 저편의 마당에 피어 있는 장미꽃들이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모습과 오랜만에 보는 수세미 넝쿨이 슬레이트 지붕을 타고 올라 간 모습은 전형적인 고향의 풍경을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이번 추석은 가족들과 어울려 별 탈 없이 잘 보냈습니다.
어머님은 살아생전 모든 일에 있어서 철저한 준비와 꼼꼼한 살림솜씨를 자랑하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런 어머님께서는 애써 두 며느리를 믿으시면서도 마음 한켠으로는 불안한 마음도 숨기지 않으시고는 했습니다.
어머님께서 돌아가신지 어느덧 2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두 며느리들은 벌써 두 번의 추석 아침과 설날 아침을 보냈고, 두 번의 어머님 제사도 지냈습니다.
어머님께서 돌아가신 후에 맞았던 첫 번째 추석 때, 형님과 저는 처음으로 차례상을 준비하면서 얼마나 긴장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어머님께서도 저희들보다 더 마음을 졸이면서 두 며느리들을 지켜보셨을 것입니다.
요즘 나름대로 명절맞이에 익숙해지면서 '나 혼자보다는 형님과 둘이서 힘을 합하여 명절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다행이구나'하는 생각이 절실하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아마 어머님께서도 두 며느리들이 오손 도손 모여 앉아 명절 음식을 장만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래, 이제 너희들은 마음을 놓아도 되겠구나' 하시면서 빙그레 웃으실 것 같은, 그런 마음 뿌듯한 추석을 보내고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