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영실은 소나무 숲과 계곡, 기암괴석 사이로 펼쳐지는 운무가 산행의 묘미를 더해 준다. 자주 오르는 한라산이지만 오를 때마다 새롭게만 느껴진다. 지난주의 푸름이 연한 자주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한라산 영실코스 중 가장 힘든 곳은 해발 1400m지점. 급경사로 이루어진 돌계단을 올라 갈 때면 한 겨울에도 땀이 흥건히 고이는 곳이다. 사람 사는 곳에도 힘든 코스가 있듯이 산행 길에는 꼭 오르막이 있다. 그래서 해발 1400고지는 뒤돌아 온 길을 회고하게 된다. 늘 오르는 계단이건만 이 지점에 만 오면 많은 사람들은 투덜댄다. "왜 이렇게 산이 험 하냐?"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 고개만 넘으면 하늘을 감싸고 있는 병풍바위가 천년의 바위처럼 버티고 있다. 고갯길을 넘으면 1600고지 전망대가 나오는데, 왜 이렇게 발걸음이 더디 떨어지는지 모르겠다.
산등성이 위에 오롯이 서 있는 바위는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쳐다보듯 바라봐야 그 풍경을 발견할 수 있다. 온갖 자연 재해에도 굴하지 않고 끄덕없이 서 있는 바위. 아무리 심한 태풍이 불어도 한라산 영실 바위가 낙석 되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으니, 한라산 영실기암은 분명 신령의 바위 같다.
어떤 이는 산에 오르면서 오백장군을 하나하나 세어보는 사람들이 있다. 어리석은 일 같지만 바위 하나하나에 담겨진 돌의 생명을 숫자로 세어 보는 산사람들이 있어 한라산은 다시 태어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기암괴석의 모양이 다르지 않은가?
지금 한라산은 각종 야생화가 지천을 이르고 있다. 돌부리 아래 자라나는 끈질긴 야생화의 생명력은 아마 구름을 먹고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심히 밟고 지나가는 산속에 뾰족이 얼굴을 내밀고 있는 야생화. 한라산 영실은 모든 자연이 진통을 하듯 꿈틀거린다.
계절을 실감하듯 가을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다. 만추의 한라산에 발길을 멈춰보는 여유로움. 발 닿는 곳마다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니 그 신비스러움에 반해 산에 오른다.
해발 1500고지에서 물 한 모금 마시려고 평상에 앉아있는데, 외국인의 콧노래 소리가 들려 왔다. 국경을 초월한 자연의 교감. 그것이 산의 아량은 아닐런지. 주말 한라산은 분주해졌다. 광주 살레시오 고등학교 1학년 300여명이 수학여행 차 제주에 왔다가 한라산 영실을 오르니 병풍바위 앞은 발 디딜 팀이 없다.
"아줌마! 정상가려면 멀었어요?"
뒤뚱거리며 돌계단을 오르는 고등학생 친구는 정상을 묻는다. 땀방울을 흘리는 걸로 봐서 산행이 힘든가 보다. "정상? 아직 멀었지!" 라며 대답을 하자, 실망한 듯 땀방울을 닦는다. 정상이 그렇게 코앞에 펼쳐져 있으면 산에 오르는 재미가 있겠는가?
"여보게! 힘들어지기 위해서 오르는 게 산행일세!"라며 혼잣말로 속삭여 본다. 그러나 그 의미를 고등학교 1년생이 어찌 알겠는가? 병풍바위 앞에 주저앉아 일어설 줄을 모르는 학생들을 보니 은근히 걱정이 된다. 인생의 먼 길을 걸어야 할 청소년들이 이렇게 나약하다니 걱정이다.
그러나 1700고지에는 벌써 콧노래를 부르는 유치원생들이 줄을 이뤘다. 발걸음이 가벼운 어린이들을 보니 나도 모르게 힘이 솟는다.
드디어 선작지왓, 흐르는 땀을 닦으며 뛰어가듯 윗세오름으로 달려가도 좋을 산행코스. 그 선작지왓에서 펼쳐지는 운무의 춤, 정상인 백록담이 보일 듯 말 듯하다. 한라산 영실에서는 윗세오름이 정상이다.
한라산 터줏대감 까마귀가 비상을 하며 손님을 맞이하는 한라산 영실, 지금 한라산은 가을을 단장한다. 가을이 익어가는 이 계절 "한라산 영실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