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심리학자 다우베 드라이스마(Douwe Draaisma) 교수의 책 <나이 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에코리브르)는 우리의 기억에 관한 책이다. 그러나 여느 심리학 책과는 사뭇 다르다. 심리학 교과서를 들춰보면 기억의 종류만도 수십 가지로 나눠놓고 있다. 기억이 저장되는 시간에 따라 단기기억/장기기억, 기억이 연결되는 감각에 따라 청각기억/영상기억, 기억이 저장되는 정보의 종류에 따라 어의적 기억/운동기억, 시각기억 등등…….
그러나 일반인이 관심을 갖는 기억은 이런 것이 아니다. 가장 어린 시절의 기억, 어렸을 때 살던 집의 구조, 가장 최근에 읽은 책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들이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심리학자들은 이런 개인적 기억을 ‘자전적 기억(autobiographical memory)’이라 명명하고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했다.
왜 서너 살 이전의 기억은 거의 없을까? 왜 수치스런 경험은 좀처럼 잊히질 않는 걸까? 왜 노인이 되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더 또렷해질까? 왜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난 날의 기억은 사진처럼 선명할까? 왜 기억은 거꾸로 돌리기가 안 될까? 왜 냄새에 관한 기억은 그렇게 오래도록 강렬할까? ‘전에도 이런 상황을 경험한 것 같다’는 데자뷰는 왜 일어나는 걸까? 죽음에 임박해서 눈앞에 자신의 인생이 영화처럼 펼쳐지는 현상의 진실은 무엇일까?
정신적 외상(trauma)은 우리의 기억력에 얼마나 치명적일까? 한 번 보기만 해도 모든 것을 기억해내는 절대적 기억력은 과연 축복일까, 저주일까? 영화 <레인맨>의 주인공처럼 비범한 계산 능력을 지닌 자폐증 천재-백치들, 일명 사방(savant)들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왜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은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질까? …… 드라이스마 교수는 누구나 한 번쯤 의문을 품었을 법한 이런 자전적 기억의 수수께끼들을 차례차례 풀어나간다.
여기서는 이 책의 제목이자 아마도 우리가 가장 궁금해 할 서두의 문제만 살펴보자.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신비한 현상의 원인은 대체 무엇일까?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 현상을 설명하고자 했다. 인생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것 같은 느낌은 시간에 대한 온갖 환상들 중 일부다. 시간의 길이와 속도는 기억 속에서 만들어진다. 즉 우리의 시간 감각의 핵심에는 기억이 있는 것이다. 심리적으로 우리가 인식하는 시간은 우리의 기억을 반주 삼아 우리 내부의 시계에 맞춰 똑딱거리며 사라져간다. 시간과 기억에 관한 최근의 연구에서 학자들은 다음의 세 가지 메커니즘을 발견해 시간이 점점 빨라지는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첫째, 망원경 효과(telescopy)다. 망원경을 통해 사물을 보면, 그 물체가 아주 선명하고 자세하게 보이기 때문에 그 물체까지의 거리가 실제보다 짧게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과거를 돌아볼 때도 마치 망원경을 통해 보는 것처럼 사건들이 확대되어 보이기 때문에 시간적인 거리가 축소되고, 그 사건이 아주 오랫동안 지속된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대중적 사건들을 실제보다 더 최근의 일로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한 흉악범죄의 죄인이 최근 석방되었다는 뉴스를 접하면, 사람들은 “아니, 형기가 벌써 끝났단 말이야? 그럼 그 사건 이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야?”라는 식으로 반응한다.
둘째, 회상 효과(reminiscence effect)다. 일반적으로 어떤 단어를 제시하고 그것에서 연상되는 기억을 떠올려보라고 하면, 가장 최근의 기억이 제일 많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즉, 더 어린 시절에 관한) 기억은 급격히 줄어드는 그래프를 보인다. 이것이 이른바 정상적인 ‘망각곡선’이다. 그러나 60대 이상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동일한 실험을 해보면, 전체적으로 비슷한 결과가 나오지만, 유독 20세를 전후로 한 약 10년간의 시기에 기억의 양이 불록 솟아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노인들의 회상에서 특히 이 시기에 기억이 집중되어 있는 것을 가리켜 회상 효과라고 한다.
사람들은 기억 속의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알아내려 할 때 자기만의 어떤 시간의 표식을 사용한다. “내가 P의 밑에서 일하고 있을 때” “내가 Q에 살고 있을 때” 식으로 말이다. 따라서 나이 많은 사람들이 스무 살 때 일을 더 쉽게 기억해내는 현상, 즉 회상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그 시기에 적용할 수 있는 시간의 표식이 더 많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를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처음으로 ……했을 때” 등이 모두 이 시기의 전형적인 시간의 표식들이다.
그리고 이처럼 어떤 시기를 회고하면서 많은 기억들을 떠올릴 수 있다면 기억을 별로 떠올릴 수 없는 시기보다 그 시기가 더 길게 느껴질 것이다. 또한 중년 이후에는 시간의 표식이 줄어들기 때문에 기억 속에 빈틈이 생기면서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셋째, 생리적 시계다. 우리 몸속에서는 수십 가지의 생리적 시계들이 똑딱거리고 있다. 호흡, 혈압, 맥박, 호르몬 방출, 세포분열, 수면, 신진대사, 체온……. 이들은 모두 고유한 주기를 갖고 있으며, 우리 삶에 리듬과 박자를 부여해준다. 체내의 모든 시계를 통제하는 주인 역할을 하는 것은 시상하부 교차상핵(SCN)이다. 만약 SCN에 문제가 생기면 체내의 모든 시계가 고장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런데 나이를 먹을수록 SCN의 세포 수가 감소하고, 그것의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도 줄어든다. 이로 인해 시간감각에 중대한 문제가 일어난다.
미국의 신경학자인 P. A. 맹건(Mangan)은 노인들에게 하나, 둘, 셋 이렇게 세는 방식으로 3분의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추정해보라는 실험을 했다. 젊은이들은 3초 밖에 오차가 나지 않는 반면, 노인들은 평균 40초나 더 경과했다. 무언가 다른 일에 몰두하게 하면서 똑같은 실험을 하자, 노인들은 거의 2분에 가까운 시간이 더 흐른 뒤에야 비로소 3분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나이를 먹으면 사람은 느리게 가는 시계로 변해버리는 것 같다. 전체적인 속도가 그냥 느려지는 것이다. 젊은이의 생체시계는 대개 노인의 생체시계보다 빨리 움직인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하루가 길게 느껴지지만 나이를 먹으면 하루가 무서울 정도로 짧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현실 속의 시간을 헤아릴 때, 무의식적으로 생리적 시계를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객관적인 시간, 즉 시계에 표시되는 시간은 계곡을 흐르는 강물처럼 일정한 속도로 흐른다. 인생의 초입에 서 있는 사람은 강물보다 빠른 속도로 강둑을 달릴 수 있다. 중년에 이르면 속도가 조금 느려지기는 하지만, 아직 강물과 보조를 맞출 수 있다. 그러나 노년에 이르러 몸이 지쳐버리면 강물의 속도보다 뒤처지기 시작한다. 결국 그는 제자리에 서서 강둑에 드러누워 버리지만, 강물은 한결같은 속도로 계속 흘러간다.”
덧붙이는 글 | <나이 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
다우베 드라이스마 지음|김승욱 옮김
신국판|408쪽|값 16,500원
에코리브르
* 이기홍 기자는 <나이 들수록 왜 시간이 빨리 흐르는가>를 진행한 편집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