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기를 듣고 나니까 이 말썽꾸러기가 달리 보였다. 매우 대범한 애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부모를 잘못 만나 제대로 보호 받지 못해 반항적으로 나가고는 있지만 평범한 그릇의 아이가 아님은 분명했다.
나중에 왕이 되고 칸이 되는 무왕과 칭기즈칸의 어린 시절 또한 이 말썽꾸러기와 별로 다르지가 않았다. 무왕은 머리는 좋았으나 이 머리를 남의 떡이나 훔쳐 먹는데 쓰는 말썽꾸러기였고, 칭기즈칸은 이복동생이 자기 뜻을 자주 거스르자 10살짜리 꼬마일 때 이복동생의 가슴에 화살을 쏜 위인이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살이 터질 정도로 얻어맞으면서 ‘죽어버리라’는 호된 소리도 들었었다. 어른들의 정답에서 벗어난 것도 대범한 기질을 보이는 것에서도 이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사람이 갖고 있는 기질이 그 사람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여기는 편이다. 즉, 성격은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성격은 환경에 의해서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대체로 타고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운명은 의지와 관련 없이 이미 정해지는 것이다. 정해진다면, 결정하는 주체자가 있어야 할 텐데, 바로 이 시점에서 종교가 등장하게 된다. <칭기즈칸>에서는 장생신이 테무진의 운명을 결정지었고, <서동요>에서도 서동은 이미 왕이 될 운명임을 예고하고 있다.
이병훈 연출가와 김영현 콤비가 <대장금> 이후 내놓은 작품으로 시선을 모은 <서동요>는 백제시대를 다룬 최초의 드라마로, 백제 30대 무왕에 관한 얘기다. 그리고 말 1천 필과 출연진 10만이라는 대단한 규모의 중국 드라마 <칭기즈칸>은 침략자의 이미지가 강한 칭기즈칸의 성공담을 그리고 있다. 모두 영웅을 모델로 해서 만든 드라마들인데, 이들은 둘 다 운명적으로 왕이 될 운명을 타고 났다는 운명론을 짙게 깔고 있다. 현재는 비록 하잘 것 없는 신분이지만 하늘의 점지를 받은 귀한 몸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려주고 있다.
나중에 무왕이 되는 서동이 저잣거리를 친구들과 어울려 떡이나 훔쳐 먹고 말썽이나 부리는 그런 아이에 불과하지만 나중에 왕이 될 거라는 운명을 타고 났다고 한다. 아버지가 왕이었으니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머니와 함께 이미 궁궐에서 쫓겨나 이름 없는 아이로 숨어 사는 마당에 어린 서동이 임금이 될 확률은 아주 약해 보이는데도 이미 그런 운명이라고 한다.
서동이 어렸을 때 태학사에 들어갔다가 향을 만졌는데 향로에서 난데없이 연기가 올라왔다. 향로에 향을 꽂고 불을 붙이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향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차갑게 식어있던 향로가 서동이 만지자 연기를 피웠던 것이다. 왜냐면 이 향로와 관련한 예언이 있는데, '나중에 임금이 될 이가 만지면 향을 피울 것이다' 하는 예언이 전해 내려오고 있던 것. 향로의 예언에 의하면 서동이 왕이 된다는 것이다.
<칭기즈칸>의 어린 테무진 또한 예언을 갖고 태어난 인물이다. 태어날 때 손바닥에 무슨 징표를 갖고 태어났다고 한다. 이 징표는 천신이 나중에 초원을 통일할 영웅에게 내려준다는 징표라고 한다. 그 징표의 예언을 어린 테무진은 사실화시키고 있다.
초원 한 부족 수령의 아들이었지만 아버지가 독살 당하자 부족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이제 열 살이 된 테무진과 어른 여자 셋, 그리고 어린 동생들만 초원에 남겨졌다. 먹을 걸 구하기도 어려운 절박한 상황에 있던 테무진은 19살이 되자 초원에 명성을 날리기 시작하고 흩어졌던 무리들이 다시 테무진의 품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초원 대통일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드넓은 초원에 버려졌던 한 아이가 천신의 백이 있었기에 몽골 대평원에 흩어져있는 수많은 부족을 통일하고 몽골제국의 초대 칸이 될 수 있었다. 드라마서도 보면 테무진은 자신이 평범한 아이가 아니고, 천신의 징표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라는 걸 사람들에게 말하면, 또 상대방은 그걸 사실로 받아들인다. 천신에 대한 믿음과 운명론에 대한 확신이 강함을 발견할 수가 있다. 테무진이 자신의 원적인 투투에게 이런 말을 하는 대목은 합리적 사고에 물든 우리에게는 참으로 우습고 낯선 대화였다.
“투투 넌 내가 천신의 징표를 갖고 나온 애라는 것 알지. 만약 내가 지금 죽게 되면 난 천신에게 가서 너의 죄를 다 고할 거야.”
천신은 아마도 초원을 떠도는 유목민들의 유일신인 듯 했다. 이런 전지전능한 신의 비호를 받는 칭기즈칸은 곳곳에서 도와주는 이가 나타나 위기에서 목숨을 구했다.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 칭기즈칸을 구해주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았다. 역시 천신이 아끼는 아이였다.
‘임금은 하늘이 내린다’는 말이 있다. 지금도 사람들 의식에는 임금은 하늘이 내린다고, 아무나 되고 싶다고 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