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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거실은 한쪽 벽면 전체가 그림벽지로 되어 있다. 벽지에는 사방으로 뻗어 있는 나뭇가지에 피어 있는 붉은 꽃들과 나비들이 그려져 있다. 내가 그린 것이 아니고 그런 벽지를 골라 도배를 한 것이다. 여기엔 재미있는 사연이 깃들어 있다.
아들, 딸 모두 출가시키고 나니 우리 내외 그리고 애완견 두 놈, 이렇게 네 식구만 넓은 아파트에 달랑 남았다. 홀가분하기도 하고 또 섭섭한 면도 조금은 남아 있었지만 시대의 흐름이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마음을 접었다. 한동안 그런대로 지냈지만 아무래도 낭비인 것 같았다. 우리 네 식구가 살기에는 아파트가 너무 넓었다.
그래서 큰 결단을 하여 옆 동네에 있는 조그만 평수의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아파트는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전 주인이 좀 험하게 썼는지 실내가 낡아보여 전체적으로 손을 조금씩 봤다. 벽지도 더러워 아예 새로 도배를 하기로 했다.
마침 시집 간 딸아이가 왔길래 잘 됐다 싶어 아내랑 함께 벽지를 고르기로 했다. 아파트 내부 벽면 전체를 흰색으로 하자는 데는 모두 생각이 일치 했다. 흰색은 실내도 산뜻해 보이고 또한 넓게 보인다는 의례적인 생각에서 였다.
하지만 나는 좀 다른 생각을 했다. 거실의 소파가 있는 앞쪽 벽면은 색다른 벽지를 쓰고 싶었다. 평범한 것을 싫어하는 내 성격이 때문이었다.
벽지 샘플 중에서 그림으로만 그려진 벽지 하나를 지적하고 아내와 딸의 의견을 물었다.
"아빠! 여기서 보면 괜찮긴 한데 너무 튀지 않을까?"
"그래,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되는데…."
그러나 나는 고집대로 밀고 나갔다. 벽지의 그림이 어느 정도 내 그림과 좀 비슷한 동화적인 냄새를 풍겨서 친밀감이 든 것이 첫째 이유였다. 결국 아내와 딸도 나의 설득에 어쩔 수 없이 동의를 했다. 한번 모험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천정에서 벽까지 하얀 색의 실내에 오로지 한쪽 벽만을 화려한 그림으로 된 벽지로 포인트를 준다는 상상으로 내 머리 속은 이미 차 있었다. 도배 아저씨한테 잘 부탁한다고 하고 일단 철수를 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아파트에 갔다.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마! 생각보단 괜찮네, 역시 우리 아빤 달라!"
"아빠 그림대로 동화냄새가 난다. 그렇지?"
딸과 아내는 함빡 웃으며 좋아했다.
이사를 하고 처음 몇 달은 벽쪽을 쳐다보아도 지루하지 않았다. 마치 백호 이상의 그림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변덕 심한 게 인간이라 매일 같은 그림만 보고 있으려니 조금씩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순간 내 머리를 때리고 지나가는 섬광이 있었다.
'저 곳에다 내 그림으로 덧칠을 하는 거야!'
'그래! 바로 그거야!'
꽃나무 사이사이의 빈 공간에 아이들을 그려 넣기로 했다. 내게는 어린 손자와 손녀가 있으니 그 애들을 그려서 꽃나무 가지에 앉히기로 했다. 결심을 굳히고 바로 실행에 옮기는 시간만 기다렸다.
드디어 어느 토요일, 아내는 동창들과 약속이 있다며 외출을 했다. 집안에는 나와 애완견 두 놈 외에는 아무도 없다. 절호의 기회였다. 나는 서둘렀다. 불투명 수채화 물감을 파렛트에 짜 넣고 연필로 벽면에다 스케치했다. 가운데 TV를 중심으로 손자는 왼쪽에, 손녀는 오른 쪽에….
벽면은 매끄럽지 못하고 까칠까칠한 재질로 되어 있기에 밑그림 그리기에는 불편했지만 기왕 시작했으니 중도에 그만 둘 수는 없었다. 지우고, 그리고 또 지우고, 그리기를 몇 번이나 해서 기초가 완성되었다. 그 위에 물감으로 수차례에 걸쳐 덧칠하고 했더니 색깔은 의외로 쉽게 벽면에 스며들었다.
물론 그림은 벽지에 그려진 꽃나무의 터치와 같이 맞추었다. 그림을 완성하고 멀리 소파에 앉아 벽지를 보니 깜쪽 같았다. 새로 그린 티가 하나도 나지 않았다. 원래부터 벽지에 그려진 그림 같았다. 오히려 꽃나무와 나비만 있던 그림에 아이들도 함께 그려넣으니 조화가 더 잘되는 것 같았다. 이번만은 별로 욕먹을 짓은 아닌 것 같았다.
오후에 동창회 끝나고 돌아온 아내가 보더니 깜짝 놀란다. 나의 기상천외한 아이디어에 놀라워 하면서도 한편으론 신기해 했다.
"정말 감쪽같네. 아니 어떻게? 이 사람이!"
아내는 가까이서 멀리서 계속 들여다 보고, 또 보고 한다.
"다행이네. 난 또 벽에다 낙서했다고 한마디 들을 줄 알았는데…."
아내는 눈을 흘긴다. 그러나 그 눈빛엔 애교가 섞였다.
아내와 나는 소파에 앉아 다시 아이들 그림을 보면서 웃는다.
"애들아! 저 벽그림 속 꽃나무가지에 너희들이 앉아 있네."
돌아 오는 일요일, 아들네, 딸네들이 아이들 데리고 와서 벽면을 보고 좋아할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흐뭇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