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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락산 꼭대기. 국기봉이 보인다. 해발 385m로 뒷동산 수준이지만 얕보면 큰코 다친다.
모락산 꼭대기. 국기봉이 보인다. 해발 385m로 뒷동산 수준이지만 얕보면 큰코 다친다. ⓒ 의왕시청
모락산은 경기도 의왕시 오전동과 내손동에 걸쳐 낮은 자세로 웅크리고 있다. 산 전체가 바위다. 서쪽으로 의왕시와 안양시가 넓게 펼쳐지고 그 너머로 수리산과 관악산이 가깝게 보인다. 북동쪽으로는 청계산과 백운저수지가 눈에 들어온다. 잘 닦인 등산로가 사방 있는데, 잉걸아빠 집에서 오 분도 채 안 되는 곳에도 반들반들 윤나는 등산로 들머리가 있다. 정확하게는 '고천중학교' 왼쪽, '오매기약수터' 맞은편에 떡하니 고샅길이 품을 열고 있다.

산이랄 것도 없는 해발 385m 그러나...

눈 한 번 치켜뜨면 그만인 낮은 산. 그러나 모락산은 가볍게 볼 산이 아니다. 아무 동네 뒷동산 아니냐고 나무라면 할 말 없지만, 역사와 전설을 켜켜이 앙다문 입매를 보노라면 감히 무시하지 못한다. 또한 의왕시의 자랑이기도 하다. 의왕시 어느 곳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십여 분 안에 오를 준비 끝내고 들머리에 설 수 있는 산. 결코 쉬운 자랑이 아니다. 6·25 당시 이곳에서 북한군을 무찌른 국군 제1사단 15보병연대의 전승기념비가 있기도 하다.

잉걸네 동네 말고도 이런 들머리 솟을대문이 모락산 사방에 있다.
잉걸네 동네 말고도 이런 들머리 솟을대문이 모락산 사방에 있다. ⓒ 이동환
모락산은 슬픈 전설을 머금고 있다. 잉걸아빠가 확인한 것만 대여섯 가지 되는데 개연성이 충분하면서도 두루 알려진 두 개만 소개하자면 이렇다. 첫 번째는 임진왜란과 관련 있는 이야기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이곳까지 들이닥쳤다. 온 마을 사람들은 난리를 피해 이 산 속 굴로 숨어들었다. 그때 어린아이 하나만이 미처 굴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울고 있었는데 언저리까지 쫓아온 왜군들이 그만 아이를 발견했다.

온 마을에 사람 그림자라고는 없는데 아이 하나가 굴 앞에서 울고 있자 왜군들이 들머리에 불을 질러 버렸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굴 속에서 어이없이 죽고 말았다. 그 뒤부터 사람들이 이 산을 모락산이라고 불렀단다. '몰아서 죽였다'가 '모라 죽였다'로, 또 '모라 죽인 산'으로 불리다가 모락산으로 되었다 하니 참 기막힌 얘기다.

두 번째는 '임영대군'과 관련된 이야기다. 임영대군 '이구(李璆, 1418~1469)'는 세종의 넷째 아들로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다. 학문을 닦는 데 힘써 시ㆍ서ㆍ경ㆍ사ㆍ병서에 뛰어났으며, 화차 제작에도 남다른 재능을 보여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활달했다. 왕손이면서도 근검했던 그는 백성들로부터 진심어린 존경을 받았다. 천민 앞에서도 교만하지 않았다 하니 가히 소탈했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형제 갈등이었다. 동기간인 수양대군이 조카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뒤 사육신ㆍ생육신 등의 충신들이 일어났을 때 그 여파가 임영대군에게까지 미치게 되었다. 임영대군은 장님으로 가장하여 혼자 남태령을 넘어 심산유곡인 광주 의곡(현재 의왕시 내손동)에 숨어 초가집을 짓고 살았다. 또 다른 얘기로는 원래 장님이어서 세조가 차마 죽이지 못하고 이곳으로 귀양 보냈다고도 한다.

허구한 날 산에 오르는 게 소일거리였는데 옛 중국의 수도인 낙양(洛陽, 바꿔 말해 한양을 뜻하기도 함)을 사모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정치적인 망명을 생각하면서도 한양에 얽힌 응어리를 잊지 못했으리라. 또는 자유롭게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곳으로 떠나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이 산을 일컬어 모락산이라고 했다 한다. 실제로 임영대군파 족보에는 모락산(慕洛山)으로 되어 있다.

위, 모락산 등산로는 누구나 오를 수 있도록 완만하게 공사되어 있다. ▲ 아래, 체력 단련장과 언저리 약수터.
위, 모락산 등산로는 누구나 오를 수 있도록 완만하게 공사되어 있다. ▲ 아래, 체력 단련장과 언저리 약수터. ⓒ 이동환
왼쪽 위부터 오른 쪽으로, 떡갈나무와 소나무(미국산 리기다 소나무에 맞서 대견하게 뿌리 내린 우리 토종). ▲ 아래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졸참나무와 진달래. 모락산에서 흔하게 보는 나무들이다. 진달래는 아무래도 내년까지 못 기다리겠는지 온 몸을 비비 틀고 있다.
왼쪽 위부터 오른 쪽으로, 떡갈나무와 소나무(미국산 리기다 소나무에 맞서 대견하게 뿌리 내린 우리 토종). ▲ 아래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졸참나무와 진달래. 모락산에서 흔하게 보는 나무들이다. 진달래는 아무래도 내년까지 못 기다리겠는지 온 몸을 비비 틀고 있다. ⓒ 이동환
위, 돼지바위와 소원 빈 사람들이 올려 놓은 돌들. ▲ 왼쪽 아래는 큰범바위. ▲ 오른 쪽 아래는 멀리 보이는 백운산.
위, 돼지바위와 소원 빈 사람들이 올려 놓은 돌들. ▲ 왼쪽 아래는 큰범바위. ▲ 오른 쪽 아래는 멀리 보이는 백운산. ⓒ 이동환
왼쪽 위 굴참나무, 아래는 신갈나무. ▲ 오른 쪽은 팥배나무. 아직 단풍은 멀었다.
왼쪽 위 굴참나무, 아래는 신갈나무. ▲ 오른 쪽은 팥배나무. 아직 단풍은 멀었다. ⓒ 이동환
잉걸아빠가 일주일에 한두 번은 오르는 산. 그 숨은 얘기를 울대뼈에 머금고 오르자니 가슴놀이 한 구석이 짠하다. 산꼭대기에 오르면 삼국시대 백제의 전략 요충지 역할을 했던 모락산성 터가 있다. 물론 기록만 있을 뿐 그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행인 것은 의왕시가 모락산성을 복원하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왼쪽 위는 모락산 꼭대기에 이르기 직전, 마지막 가쁜 숨 몰아야 하는 300여 계단. ▲ 오른쪽 위는 산꼭대기 정자. ▲ 왼쪽 아래는 꼭대기 언저리 절터약수터. ▲ 오른쪽 아래는 산꼭대기에 있는 모락산성터 안내 표지판.
왼쪽 위는 모락산 꼭대기에 이르기 직전, 마지막 가쁜 숨 몰아야 하는 300여 계단. ▲ 오른쪽 위는 산꼭대기 정자. ▲ 왼쪽 아래는 꼭대기 언저리 절터약수터. ▲ 오른쪽 아래는 산꼭대기에 있는 모락산성터 안내 표지판. ⓒ 이동환
모락산성은 돌로 쌓은 성으로 한성 백제기(4~5세기)에 축조되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둘레가 920m에 달했다고 한다. 모락산성의 형태는 북벽이 길고 남벽이 짧은 사다리꼴이다. 문터와 망대, 건물터 일부가 남아 있으며 백제 시대 토기 일부가 출토되고 있다. 이곳은 의왕과 수원은 물론이요, 안양과 군포와 과천, 그리고 서울이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조망이 좋다.

당시 한강 유역을 두고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삼국시대에 경기 남서부 일대의 평야지대를 효율적으로 점령하고 한강 유역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통제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의왕시는 2005년이 가기 전까지 산성에 대한 고증과 검증, 정밀지표조사를 벌인 뒤 지방문화재 등록을 신청할 예정이다. 2010년 이후부터 복원할 계획이라는데 에고, 그때까지 기다리자니 숨넘어 가겠다.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산. 산꼭대기에 올라 크게 숨을 들이마시니 호연지기가 따로 없다. 높고 험한 산을 올라야 웅지가 펼쳐지는 것은 아니다. 그저 매일 오르는 뒷동산일망정 산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만이다. 더불어 건강까지 챙길 수 있다. 바람벽에 똥 바를 때까지 '징'하게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지만, 살아 있는 동안은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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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커서 '얼큰샘'으로 통하는 이동환은 논술강사로, 현재 안양시 평촌 <씨알논술학당> 대표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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