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을 찾은 날은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사람이 별로 없었다. 가끔 만나는 사람들도 '쏼라쏼라' 중국말을 하는 중국인 관광객이었다. 사람 많아서 북적대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잘 됐다 싶기도 하고 깊은 산중에서 너무 외로운 거 아닌가, 하는 상반된 생각이 교차했다.
설악산 입구에서 큰 애가 케이블카를 태워 달라고 졸랐다. 집이 양양이라 단풍 들 무렵에 또 올 텐데 그때 타라고 타이르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주차장을 벗어나자 설악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설악산의 묘미는 역시 웅장함과 기암괴벽이다. 바위들이 하늘 어디쯤에서 불쑥 솟아나 구름을 휘감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남편은 더 올라가면 좋은 거 많으니 배터리를 아끼라고 했다.
설악산의 상징인 곰 동상을 지나가자 신흥사 입구가 나타났다. 신흥사 앞에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도토리와 밤은 다람쥐의 양식이니 함부로 채취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그걸 보니 어디선가 들은 얘기가 생각났다.
지난 겨울에 어느 절 비구니 스님이 산 속을 산책하다가 도토리가 많이 모아져 있는 걸 발견하고는 웬 횡재, 하면서 묵을 쑬 생각에 그 도토리를 절로 가져가버렸다고 한다. 다람쥐가 겨울 양식하려고 모아놓은 것인데 스님이 모르고 그걸 가져와버린 것이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 스님이 밖으로 나오다가 매우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고 한다. 스님의 고무신을 물고 다람쥐 두 마리가 죽어 있었던 것이다. 도토리를 잃어버린 다람쥐들인 것이다. 그 원망을 풀길이 없어 그렇게 죽었다고 생각한 스님은 49재를 지내줬다고 한다.
신흥사를 지나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서 다람쥐들을 봤는데 옛날에 봤던 다람쥐하고 다르게 보였다. 영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만 감정이 있고, 생각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동물들도 사람이 모르는 어떤 면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악산에는 벌써 단풍이 들 기미가 보였다. 아직은 대체로 나무들이 푸르렀으나 그런 중에도 빨갛게 고운 빛으로 물든 단풍잎이 가끔씩 보였다. 횡재다 싶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설악산의 단풍을 알릴 기사를 쓸 욕심에 이쪽에서 찍고 저쪽에서 다른 각도로 찍고, 마치 사진기자라도 된 것처럼 심혈을 기울여서 찍어댔다.
그러다보니 성질 급한 남편과 큰 애는 먼저 올라가고 없었다. 나와 작은 애는 여전히 찍을 게 없나 둘러보며 서로 찍어주기도 했다. 그러다 나무에 고여 있던 빗물이 바람에 '후두둑' 떨어지면 "비 온다, 어쩌지?" 이러면서 급하게 뛰어올라갔다.
울산바위를 오르는 길목에 있는 휴게소에 들렀더니 1호 매점 아줌마가 아는 척을 했다.
"아저씨는 벌써 올라갔어요. 물 받아 가세요."
내가 들고 있던 빈병을 빼앗아 물을 가득 담아줬다. 참 친절한 아줌마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 작은 애가 음료수를 마시고 싶다고 해서 음료수를 사줬다. 시중에서 천원이면 살 음료수가 2배는 비싼 2천원이었다. 한순간 너무 비싸다 싶어 사지 말까, 하는 갈등도 있었지만 지금 아이가 음료수를 마시면서 얻을 효용은 아마도 집에서 먹는 효용에 비해서 2배는 될 테니까 2천원이 제값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또 여기 산 위까지 음료수를 땀 흘리며 누군가가 져 날라 파는데 비싼 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음료수를 사서 들고 다시 산을 올랐다.
올라가면서 계속 사진을 찍느라 울산바위 바로 아래에 있는 계조암에 이르렀을 때 벌써 남편과 큰 애는 울산바위까지 올라갔다 내려와서 거기서 쉬고 있었다. 그리고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어 나는 울산바위까지 올라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나와 작은 애가 도달한 최고지점은 계조암이었다. 역시 거기서 서로 사진 찍어주고 하다가 어두워져서 내려왔다.
큰애와 남편은 자신들이 울산바위까지 올라갔다온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큰 애는 힘들었지만 갔다 오니 자랑스럽다고 했다. 끝까지 다 올라가지 않은 작은 애와 난 자랑스러울 건 없었지만 올라오면서 순간순간을 즐겼기에 만족했다. 단풍을 감상했고, 도토리를 관찰했고, 바람 냄새도 맡았다.
남편과 난 등산하는 스타일이 달랐다. 난 목표가 중요하지 않았다. 중간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더라도 현재를 즐기고 싶어했다. 그래서 천천히 걸으면서 솔나무 냄새를 맡고 발에 와 닿는 흙이나 바위를 느끼고, 바람을 느끼고, 아주 천천히 산을 오르면서 순간순간을 즐기고 싶어하는 스타일이었다.
반면에 남편은 땀을 흘려야 한다는 스타일이었다. 등산을 운동으로 생각하는 주의였다. 목표를 정했으면 꼭 거기까지 최대한 빨리 힘들게 올라가서 성취감을 느끼고 싶어했다. 그래서 나무를 볼 틈도 없이 숨을 몰아쉬면서 급하게 걸어갔다.
그래서 처음에는 너무 늦게 간다. 너무 빨리 간다 하며 싸웠지만 지금은 자기 페이스대로 다녔다. 남편은 빨리 갔다 내려오고, 나는 천천히 올라가다가 도중에 내려오고. 남편은 정상을 맛본 자부심에 들떴고, 난 올라가는 순간순간의 만족감에서 만족을 느꼈다. 그리고 서로를 자기 페이스대로 바꾸려고 하지 않으니까 등산이 즐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