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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수(樂水)'는 화가마다 다 다르게 나타난다. 우선, 강희안의 '고사관수도'는 '보는 물'에 족하다. 한 사내가 산골 물을 내려다보는 그림으로서, 그것을 바라보는 시간과 그의 시선은 거기에 멈춘 듯 서 있다. 그 그림을 보는 독자들도 그 사내의 시선을 따라가는 물 속에 잠긴다.

다음으로 '듣는 물'이 있다. 겸재 정선의 '박연폭포'는 우레 소리를 거느린 37미터의 물줄기가 폭포 아래로 떨어지는 산수화다. 고막을 찢는 폭포수는 그림 아랫부분에 있는 선비의 귓전을 때린다. 그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이 고관대작이라 할지라도 물소리의 크기에 압도당하고 만다. 아무리 강한 심장을 지닌 사람이도 떨어지는 물소리에 기가 죽고 말 것이다.

▲ 책 겉그림
ⓒ 리브로
마지막으로 '노는 물'이 있다. 정선의 제자인 심사정이 그린 '선유도'에 나타나 있다. 사공이 조각배 안에서 배를 젓는데, 노한 바다 물결은 그 배와 사람들을 당장이라도 집어 삼키려 한다. 그런데도 선비는 태연하게 들끓는 바다를 그저 즐기고 있을 뿐이다. 선비가 지닌 배포가 아마도 노한 바다처럼 강직해서 그럴까.

이런 시각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손철주가 쓴 <인생이 그림 같다>(생각의 나무 2005)를 들여다보면 된다. 이 책에는 산수화뿐만 아니라 꽃과 새를 그린 화조화를 비롯해, 풀과 벌레를 그린 초충도 등 여러 소재로 그린 그림들을 읽어주는데, 저자만의 독특한 해석이 곁들여 있는 게 특징이다. 뿐만 아니라, 청동거울과 옹기, 기와 등 우리 옛 생활용품에 대한 감칠맛 나는 해석도 끼워 놓고 있다.

또한 반 고흐나 뭉크, 세잔, 고갱 같이 100년 전 유럽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유럽 화가들과 그들이 그린 그림들에 대해서, 그리고 중국화와 일본의 우키요에를 비롯해 팝 아트, 체 게바라 사진, 괴짜 사진가 헬무트 뉴튼 등 다양한 읽을거리도 빼 놓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맛은 오랫동안 숙성시킨 포도주 맛에 흠뻑 젖어드는 그런 느낌에 견줄만하다.

"그림 앞에서 사람들은 왜 떠드는 걸 주저하는 걸까요. 저는 작가의 그림 그리기와 감상자의 그림 읽기가 서로 달라질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상자는 맹목적인 동일시에의 집착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 허욕인 겁니다. 세상 보는 눈은 장삼이사 우수마발이 다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왜 작품 볼 때는 그 세계에 자신을 틈 없이 밀착하고픈 집착에 사로잡히는 겁니까. 동일시는 절대로 불가능한 욕망입니다. 차라리 차이를 인식하는 게 현명합니다."(프롤로그)

이 서문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그림을 읽는 독자들은 결코 화가가 보여주고픈 의도대로 읽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물론 밑바탕까지야 흔들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독자가 품고 있는 독특한 시각까지도 화가의 의도대로 끼어 맞출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독자 나름대로 지니고 있는 독특한 시선을 마음껏 발산토록 하여, 오히려 그 그림을 두고서 다양한 의미를 캐낸다면 그 또한 의미 있는 일이 아니겠냐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손철주 식 그림 읽기는 더욱 더 다양하고 또 풍부할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이를테면, 난을 그려 넣은 화훼도를 보고서 느끼는 손철주식 시각은 정말 남다르다. 그는 추사 김정희가 그린 '불이선란'은 난의 색깔이 푸르지도 않고 꽃조차 피어 있지 않으니, 지극히 관념에 차 있거나 묵시적인 느낌을 갖게 한단다. 그에 반해 표암 강세황이 그린 '난 그림'은 푸르고 붉은 색이 가득 차 올라서 지극히 현세적인 느낌을 갖게 하고, 임희지가 그린 '묵란도'는 바람기가 물씬 풍겨 오르는 농탕한 자태를 드러낸다고 한다. 그리고 김지하의 '란이 바람을 타는가, 바람이 란을 타는다'에 나타나는, 정말로 길게 늘어뜨린 난은 '한의 지속'과 '혼돈의 질서'를 알리고픈 마음에서 그린 것이라고 한다.

또 하나, 작자 미상으로 알려진 '송인명 초상'을 읽어내는 방식도 정말로 독특하다. 보통 초상화는 외양을 중시하는데, 유독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전신기법'을 강조했다고 한다. 이는 모델의 정신까지 화면에 살려내는 기법이라고 한다. 그런데 송인명의 주름선은 손을 덜 본 탓인지 치밀하지 않고, 눈도 정면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마치 상념에 잠긴 듯 아래로 내려뜨고 있다.

그런 까닭에 보통 사람들이 보면 어수룩하고, 가엽게 여길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 그림이 조선시대 '전신기법'을 강조한 그림이요, 자랑할만한 그림인지, 반문조차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 그림 속에서, 조선시대의 피비린내나는 사화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처세와 너그러운 정신을 읽어 볼 수 있다고 한다.

더욱이 그 초상화의 백미가, 입술 앞으로 빤히 드러나 있는 뻐드렁니에 있다고 한다. 이런 인상은 그 당시 저항하기 힘든 포용력 있는 인물로 비쳐졌음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 초상화에 비해 정밀성이나 화려함에 있어서 뒤떨어지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그것이야말로 우리 옛 초상화의 진정한 자랑거리가 아니겠나, 하는 것이다.

"색은 칠한 둥 만 둥, 붓질은 듬성듬성, 게다가 시골 밥상 덮개만한 종이나 천 조각에 그려 관객을 압도하는 위용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 초상화의 비교우위는 어디에 있을까. 앞서 말한 '전신', 곧 '이형하신(以形辭神)'에 있다. 얼굴을 통해 정신을 그리는 이 방식이야말로 삼베가 비단을 이기는 길이었다."(69쪽)

그리고 또 하나의 작품을 읽어주는 게 있다. 스리랑카의 화가 시리세나가 그린 '라다와 크리슈나'가 그것이다. 보통 스리랑카라고 하면 가난에 찌들린 외국인 노동자를 떠올리기가 십상이다. 그래서 그 나라 사람이 그린 그림 또한 별 볼일이 없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전통 예술로 본다면 다른 어떤 나라에도 뒤떨어지지 않는 그림들이 많다고 한다.

시리세나가 그린 그 작품 속에는 종교적인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피리 부는 남자를 등장시키고 있고, 꽃을 장식하여 배치하고 있고, 새와 다람쥐까지도 뛰노는 모습이 나타난다. 색감도 어찌나 원색적인지 온통 울긋불긋하다. 마치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을 연상시킬 정도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보는 눈과는 달리 손철주는 뭔가 다른 눈으로 보고 있다. 이를테면 그 그림 속에는 뭔가 모자란 듯한 천진성이 드러나 있고, 전통에 바탕을 둔 현대적 조형성이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림을 잘 모르는 보통 사람일지라도 바보같이 모자란 듯한 그 그림 속에서, 뭔가 익살스런 것을 느낄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그림이 그렇지는 않지만, 덜 세련된 그림 속에서 재치 있는 유머와 너름새는 오히려 더 큰 법이고, 이는 앞서 이야기한 '송인명 초상'과 같이, 앞 잎술에 드러난 뻐드렁니 속에서 잔잔한 포용력을 느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 않겠나 싶은 것이다.

인생이 그림 같다 - 미술에 홀린, 손철주 미셀러니

손철주 지음, 생각의나무(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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