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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갓 쓰고 배를 저어 한산사로 가자
삿갓 쓰고 배를 저어 한산사로 가자 ⓒ 화순군
아직 비행기를 타보지 않아서 제주도는 잘 모르지만 사진으로 웬만큼 보았다 자부한다. 흑산도를 지나 홍도(紅島)에서 유람선을 타고 한바퀴 빙글 돌아봤는데 가히 빼어난 절경이다. 거제에서 외도를 거쳐 해금강 굴속까지 가봤다. 그곳 역시 아름답다.

어디 아름다운 곳이 이곳뿐이더냐. 채석강도 빠트릴 수 없다. 층층이 쌓이고 또 깎인 세월이 묻어나 심란한 마음을 버리고 오기에 안성맞춤이다. 소금강을 품고 있는 오대산 골짜기 비경이 그립고 대청봉에서 단풍이 울긋불긋 수놓은 설악산 굽이굽이 내려다보면 빠져나오고 싶지 않다.

금강산 1만2천봉과 백두산 천지 가볼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통일이 되면 제일 먼저 가서 둥지를 틀고 싶은 곳은 묘향산이다. 원산을 지나거든 진짜 명사십리 해변에 마냥 뛰놀고 싶다.

지금 가도 흔적을 볼 수 있고 물염적벽은 그대로 있답니다.
지금 가도 흔적을 볼 수 있고 물염적벽은 그대로 있답니다. ⓒ 김규환
동서남북 어디를 가나 금수강산 산해진미에 각양각색 풍경과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삶도 한번쯤 누려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 떠돌이라 부르던 정처 없이 배회하는 방랑자라 하든 상관할 바 아니다. 마음이 향하는 데로 발길 머무는 곳에 한 몸 내맡기면 되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돈 걱정, 자식 걱정, 아내 생각과 주변을 모두 물리고 훌훌 떠나서 모두 잊고 살아보면 정말이지 살맛이 날 테인데. 스님처럼 정박하지 않은 삶, 잠시도 쉬지 않고 매일같이 옮아가 세상의 객(客)이 되어 떠난다면 이것도 세상살이다.

난고 김삿갓은 병연을 버리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일이 꼬이지만 않았던들 그냥 양반노릇으로도 바쁠 명문가 자제였다. 그리 살았더라면 당쟁과 사화에 연루되어 역사책 구석 어딘가에서 한두 줄 만날 위인이었는지도 모른다.

한양에서 함경도로 다시 영월로 전전하던 유년시절을 지나 역적 김씨를 논하나 결국 제 할아버지였다. 홀연 한양을 떠난 그는 유랑의 길에 접어든다. 압록강 아래에서 시작하여 주유천하(周遊天下) 하였다.

희롱과 주사를 마다않고 질펀하게 때론 양반입네 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대작을 하였으리라. 쓰러져가는 농가 헛간에서 남루한 옷에 지푸라기 뒤집어쓰며 슬픈 잠을 자야했던 그는 갖은 홀대와 멸시, 조롱을 삼키고 민중의 처지에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조소했다. 해학으로 풍자하며 40평생을 떠돌이로 마감하였다.

중학교 2학년 봄 소풍 때 사진
중학교 2학년 봄 소풍 때 사진 ⓒ 김규환
중국지명을 본 딴 곳이 꽤 있다. 내가 살았던 호남(湖南)이 중국에도 있다. 뿐인가 경기도 광주(廣州)는 ‘꽝조우’에서 따왔다. 강릉(江陵)도 예외가 아니다. 남과 북에 각각 있는 순천(順天)도 마찬가지다.

흥미진진한 <삼국지연의>(삼국지) 적벽대전은 전투의 진면목과 경치가 빼어나 클라이맥스다. 몇 해 전 그들이 주인공 장수 무리와 적벽 사진을 갖고 세종문화회관에 왔다. 장강(長江) 중류쯤에 있는 적벽은 별것이 아니었다. 폭이 넓기만 할뿐 절벽이 고만고만했고 절리가 볼품없었다.

‘그래, 니들이 뻥은 심하니 그토록 장황설을 푼 게야. 참 기가 막히네’라며 웃고 말았다.

수몰 후 멀리서 바라본 옛 화순 이서적벽
수몰 후 멀리서 바라본 옛 화순 이서적벽 ⓒ 화순군
어릴 적 내가 소풍갔던 화순적벽은 실로 장관이다. 깎아지른 절벽이 40여 미터가 넘는다. 우리가 살았던 보성강 동복댐 상류는 구들장 구하기는 떡먹기보다 쉬웠다. 왜인고하니 화순적벽으로 가는 길마다 얇고 널찍한 판재가 굴러다녔으니까. 물이 차고 오름에 따라 한층 두층 쌓인 퇴적물은 빛깔도 곱게 층을 이루고 있다.

게다가 백아산과 무등산 두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수 천 수 만 년의 물 흐름을 뒤집어쓰고 아름답게 깎여 있다. 파도가 깎은 채석강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정교하다. 더구나 여타 절벽은 물과 석벽이 따로 있어 괴리감 느끼기에 충분하나 창랑천이 유유히 반짝반짝 빛나며 호수로 흘러 보성만으로 흘러가 방랑시인 소식을 전했다.

그 뿐인가. 돌 틈마다 씨앗이 퍼져 무수한 나무가 자라 봄에 보면 수채화요, 가을에 가면 잉어 떼와 낙엽이 함께 노닐었다. 노도 삿대도 없는 배를 대나무로 명경지수 강바닥을 쑤욱 밀어젖히며 건너면 한산사라는 조그만 절이 옹색한 벽에 걸려 있다.

한산사로 말할 것 같으면 한명 제대로 발 딛고 오르기 힘들기도 하거니와 규모가 어찌나 작던지 어린 내 눈에도 다 들어올 정도였다. 서너 명이나 붙어서 살 수나 있었을까. 백사장엔 화순에서 담양에서 곡성에서 나주에서뿐 아니라 미어터지게 싣고 광주에서부터 풍류객 일반인 가리지 않고 들어왔다. 사철 끊이지 않고 물밀 듯 밀려와도 오염하나 되지 않은 순수 그 자체였다.

지금 보는 이 사진은 아무 것도 아니다.
지금 보는 이 사진은 아무 것도 아니다. ⓒ 김규환
광주사람들에게 당시 어디로 놀러 가느냐고 물으면 대다수가 화순 이서적벽이었다. 적벽하면 네 개가 있으나 노루목적벽이 단연 최고다. 웅장하고 수려했다. 1519년 유학자 최산두(崔山斗)가 기묘사화로 동복현에 유배와 그 절경에 빠져 중국 적벽에 버금간다하여 지은 이름이니 얼마나 경승이고 명승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천하의 김삿갓인들 어찌 정착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방방곡곡 돌고 돌아 두 번은 스쳐지나갔고 세 번째는 자기 무거운 몸을 쉬고자 찾았다. 떠돌아본들 이만한 명당이 있었겠는가. 마지막에 숨을 거둘 터로 잡은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풍광이 조선팔도 으뜸이란 건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이야기다. 게다가 물산이 풍부하지만은 않지만 인심이 넉넉하여 나누는 정이 있었다는 점이다. 남쪽으론 무등산 북쪽엔 백아산, 산에 둘러 싸여 움푹 팬 곳으로 세상과 적당히 담쌓고 굶어죽지 않을 정도만 마음을 여는데 적절하도록 한적한 곳이다.

일상사를 사는데 적격으로 건너편 한산사가 있어 적적치 않았고 사공과 강태공과 벗하며 소일하기도 적당하다. 덤으로 주위에 같이 즐기며 놀만한 귀양 온 양반들로 하여금 한양 소식을 쏠쏠히 접한 점, 따라서 가까이는 물염정이 있고 큰 고개를 넘으면 환벽당과 소쇄원 등 정자가 수두룩하여 글 읽는 소리 심심찮게 들을 수 있고 그들이 짬짜미 즐기는 유흥에 동참할 기회가 적지 않았음이다.

노루목 화순 이서적벽 위쪽에 있는 물염적벽에서 헤엄치고 놀았다.
노루목 화순 이서적벽 위쪽에 있는 물염적벽에서 헤엄치고 놀았다. ⓒ 김규환
우린 해마다 그 적벽에 소풍을 갔다. 또 그곳엘 가고 싶다. 어떻게 사람이 벽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그리 좋았을까. 정약용 선생이 다시 살아온다면 현감자리 아버지 대신 받으시라 넘기고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나는 제자가 되어 1982년 중학생이 되어 멋진 가을 소풍을 함께 보내고 싶다.

아 누가 그랬던가.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지만 댐에 수몰되어 산길로나 위쪽에 오를 수 있다니 이 허망함을 어찌 달랠까.

중 3때 수련회 갔다가 마을 친구들과 한방.
중 3때 수련회 갔다가 마을 친구들과 한방. ⓒ 김규환


 

덧붙이는 글 | 아래 주암댐이 크게 만들어졌으니 이젠 동복수원지는 1983년 이전으로 축소하면 어떨까? 고향을 잃은 수몰민과 조상대대로 즐겼던 자리를 빼앗긴 우리는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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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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