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스럽다. 현대가 대북사업에서 철수할지도 모른다는 전망과 대북사업의 투명성을 더 높이며 재도약할 것이란 전망이 엇갈리고 있다. 김윤규 현대아산 부회장 축출 결정을 두고 언론의 전망은 이렇게 엇갈리고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사태의 시발점이 된 김 부회장의 '비리'가 사실인지 여부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통일부는 지난 4일 현대로부터 내부감사보고서를 넘겨받아 검토한 결과 금강산 관광지구 도로포장공사에 투입된 남북협력기금이 투명하고 적정하게 집행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현대는 내부감사를 통해 김 부회장이 50만 달러의 남북협력기금을 유용했다고 밝힌 바 있다.
현대는 어제 임시이사회 직후 보도자료를 내고 김 부회장이 대북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각종 개인비리와 직권남용, 독단적 업무처리 등으로 회사와 사업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회사에 심각한 손해를 끼쳤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현대아산 내부에서는 다른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현대그룹이 김 부회장을 축출하기 위해 짜맞추기식 표적감사, 부실감사를 했다는 주장이다.
기관마다 해석이 다르고, 그룹 안에서도 입장이 엇갈리고 있으니 사태의 진위를 가리는 건 쉽지 않다. 현재로선 감사원의 감사 결과를 기다리는 게 최선인 것 같다.
통일부와 현대가 다르고, 현대 안에서도 서로 다른 '남북협력기금 유용' 의혹
그러나 사실 규명은 감사원 등에 맡긴다 해도 문제가 커진 과정과 이 과정에서 어떤 의도가 개입했는지를 따지는 것은 필요하다. 대북사업의 진로를 재는 중요한 단서이기 때문이다.
김 부회장의 축출에 깔린 복선, 즉 의도를 짚기 위해서는 먼저 그 주체부터 밝혀야 한다. 누가 내부감사 결과를 흘렸는지를 밝히면 그 사람의 위치와 이전의 입장 등이 종합되면서 의도의 대강을 짚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연합뉴스> 기자와 만난 현대그룹 관계자가 이렇게 말했다. "내부적으로 조용히 마무리하려던 일이 이렇게 커져버렸는데 현(정은) 회장인들 마음이 편하겠느냐."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내부감사 결과가 밖으로 유출되는 데 현정은 회장은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에 무게를 둘 필요는 없어 보인다.
현 회장이 지난달 12일, 즉 김 부회장의 대표이사직을 박탈한 데 반발한 북한이 금강산 관광객수를 절반으로 줄이라고 통보한 직후 그룹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차라리 대북사업을 포기하는 게 더 나을 수 있다"는 요지의 글을 올린 바 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또 어제의 임시이사회를 최정점에서 이끈 장본인이 현 회장이란 점도 고려해야 한다. 김 부회장 축출의 최종 책임은 결국 현 회장에게 귀속된다는 얘기다.
이제 범위를 좁히자. 현 회장은 왜 김 부회장을 축출했는가? 현대그룹 관계자의 말처럼 설령 비리가 있었다 해도 조용히 마무리할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언론에 내부감사 결과를 흘리면서까지 문제를 키운 이유가 뭘까?
<동아일보>의 '투명경영 제고설'과 <한겨레>의 '암투설'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내부감사 결과를 잇따라 단독보도한 <동아일보>의 보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아일보>는 오늘자 보도에서 김 부회장 축출에 두 가지 의미를 부여했다. "투명 경영의 의지를 분명히 했다"는 점, 그리고 "(현 회장이) 단호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독자적인 리더십을 확보했다"는 점이 그것이다.
<동아일보>는 이와 함께 현대의 이런 입장도 전했다. "현 회장의 대북사업 의지는 변함이 없으며 조속한 정상화를 바라고 있다."
이같은 보도를 정리하자면, 현대의 김윤규 부회장 축출엔 그 어떤 의도도 없다는 것이다.
내부감사를 통해 명명백백히 밝혀진 김 부회장의 비리를 '투명경영' 차원에서 원칙적으로, 그리고 단호하게 처리한 것일 뿐이며, 이런 조치가 결국엔 대북사업에 도움이 될 것이란 얘기다. 아울러 현 회장의 리더십 구축은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귀착된 결과라는 것, 한마디로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얘기다.
<동아일보>의 진단과는 달리 <한겨레>는 '암투설'에 무게를 실었다.
<한겨레>는 "대표이사급 최고경영자에게는 이사 자격을 상실하더라도 최소 6개월 동안 직함을 그대로 유지하게 하는 게" 현대그룹의 관례였다고 보도했다. 또 "설사 감사보고서의 비리내용을 모두 인정하더라도 그동안 김 부회장의 대북사업 공로를 고려해야 한다"는 현대 안팎의 지적도 소개했다.
관례가 그러했고, 현대 내 여론도 만만치 않았는데도 '마지막 가신'이자 '대북사업의 개척자'를 완전 축출한 이유에 대해 <한겨레>는 '현대의 한 임원' 말을 전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대북사업의 주도권을 놓고 오래 전부터 현정은 회장과 김 부회장 간에 갈등이 있었다."
북한과의 만남 예정된 상황에서 터진 폭탄... 왜?
두 신문의 진단이 엇갈리지만 그래도 공통분모는 남아있다. 현 회장이 대북사업을 포기한 건 아니라는 점이 그것이다. 그럴까? 이런 진단을 확정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사항을 추가 검증해야 한다. 그 가운데 무엇보다도 먼저 검증해야 하는 건 '시점'이다.
<동아일보>에 김 부회장이 남북협력기금을 유용했다는 사실이 보도된 시점은 지난달 말이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남북장관급회담에서 리종혁 북한 아태평화위 부위원장과 현 회장의 만남을 이끌어낸 직후다.
회사 공금 유용이란 단순한(?) 개인 비리만 제한적으로 공개됐던 상황에서 북한과 현대의 화해를 이끌어낼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마련됐는데도 현대는 자의든 아니든 남북협력기금 유용이란 폭탄을 터뜨렸다. 결과만 놓고 보면 판을 깨는 행동을 한 것이다.
'개인 비리'를 이유로 대표이사직을 박탈해버린 조치만으로도 '투명경영'의 계기가 충분히 확보된 상황에서, 그리고 대북사업 지속 여부를 가르는 중요한 만남이 예정된 상황에서 폭탄을 추가로 터뜨릴 필요가 있었을까? 그 이유를 단지 '대북사업의 투명성 제고'란 말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여기서 확인하기 힘든 가정이 하나 성립한다. 북한이 정동영 장관에게 약속한 '현정은-리종혁 만남'이 믿을만한 것이 아니었다는 가정 말이다.
북한이 정동영 장관의 중재 노력에 마지못해 성의를 표시하긴 했지만 그 뒤 별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면 현대로서는 북한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무작정 이것만 믿고 김 부회장 문제 처리에서 타협적 방안을 택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부정될 수 없는 '미필적 고의'... 진상은 확정되지 않았다
이런 점 때문에 현 회장의 '의도'가 뭔지를 밝히기란 쉽지 않다. 김 부회장 축츨을 통해 대북사업의 투명성을 제고하려 한 것인지, 아니면 대북사업 철수를 위한 명분쌓기에 들어간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세 가지 점을 환기하자.
하나. 현 회장은 지난달 12일 그룹 홈페이지에 글을 올려서 북한이 김윤규 부회장을 두둔하고 대북사업을 위협한다면 깨끗이 사업을 포기하는 게 더 낫다는 요지의 입장을 밝힌 적이 있다. 북한 압박용일 수도 있고, 대북사업 철수 암시용일 수도 있는 발언이다.
둘. 통일부는 "현대그룹 경영진들이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우는 격으로 일을 처리하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그런 식으로 계속 가다가는 북한의 전면 반발로 현대의 대북사업은 파탄에 이를 수도 있다는 얘기다. 현 회장의 '의도'는 몰라도 '미필적 고의'는 부정될 수 없다는 얘기다.
셋. 사태의 출발점이자 엇갈리는 진단을 정리할 핵심 관건인 '진상'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