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영화 <친절한 금자씨> 한 장면
영화 <친절한 금자씨> 한 장면 ⓒ CJ엔터테인먼트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는 심각함과 가벼움을 묘하게 뒤섞은 작품이다. 울기도 뭐하고, 웃기도 뭐한 여러 에피소드들이 의도된 키치적 분위기 속에서 차례로 이어진다. 평자에 따라 논란이 있지만 감독의 재능은 여전히 범상치 않다.

금자의 삶을 지배하는 복수심이란 감정은 내게 무척 낯설다. 남에게서 크게 피해를 보고 산 일이 없기 때문인지 그런 감정은 거세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나마 복수심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던 적이 대학시절에 한두 번 있었다. 황석영씨의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책과 어느 수사기관이 자행한 고문에 관한 책을 읽었을 때다. 그때의 끓어오르는 분노는 무척 이기적이던 삶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굳이 말하자면 그것이 복수심에 가까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감정을 정확히 복수심이라고 말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당시 운동권이 즐겨 부르던 노래 중에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이라는 노래가 있었다. 내가 아는 한, 운동권 노래의 가사 중에 유일하게 '복수'라는 단어가 들어 있었다. 동지의 무덤 앞에서 결연한 맹세를 하는 이 노래는 '동지여 복수다 복수 너를 위해'라고 끝을 맺고 있었다. 나는 이 노래의 장중하고 처연한 멜로디를 좋아했지만 마지막에 이를 때면 어색함을 느끼며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을 피하지 못했다.

<친절한 금자씨>의 클라이맥스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트특급 살인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집단 복수극 장면이다. 복수계획을 착착 실행하던 금자는 백선생의 다른 범죄들을 발견하고, 친절(?)하게도 피해자들을 불러모아 집단적으로 복수할 기회를 준다. 그리고 아이들의 살해 장면을 담은 비디오를 보며 오열하던 부모들은 유괴범을 법에 맡기지 않고 직접 처형한다.

보통의 부모라면 그 부모들에게 공감하지 않기가 쉽지 않다. 법은 너무 느리고, 인권은 때때로 얼마나 사치스러운가. 이 순간 누군가 '하지만 유괴범에게도 인권이 있는데'라고 말한다면 시쳇말로 썰렁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부모들이 유괴범을 법의 처분에 맡기기로 했다면 영화의 서사구조는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뭐 그런 시시한 이야기가 있느냐'고 관람료 환불 사태가 일어났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미학적인 이유로 이야기를 그렇게 전개한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영화의 미학과는 별개로 그 장면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경우의 위험은 지적될 수 있다.

많은 미덕에도 불구하고, 로베르토 베니니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는 위험하다. 그 영화의 나치즘에 대한 안이한 이해와 그에 터잡은 낭만적 상황 설정은 위태로워 보인다.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친절한 금자씨>의 집단복수극은 그것이 관객에게 감성적으로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기 때문에 도리어 위험하다.

법은 악명이 높다. 현실과 동떨어진 법, 느리고 잘못 적용되기 일쑤인 법, 그리고 변죽만 울리고 정말 나쁜 놈들에게는 실효가 없는 법은 '법이 어쩌지 못하는 악당을 시원하게 물리치는 영웅'들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의 비옥한 토양이 되었다. 그 이야기들은 불만족스러운 법에 지친 사람들의 판타지이고, 대리만족이다. 그런 상황에서 악당들에게도 공평하게 적용될 것이 요구되는 다양한 인권보호를 위한 장치들은 매우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 '수취인을 잘못 찾아간 편지'로 여겨진다.

하지만 모든 인권은 그러하다. 인권이란, 비록 그것을 누릴 자격이 없어 보여도, 사치스러워 보여도, 정의의 실현에 방해되는 듯 보여도 주어져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그의 자리에 있었을 수도 있고, 그에게도 어쩌면 할 말이 있을지 모른다는 매우 이성적인 추론과 역사적 경험의 산물이다.

'살인자에게 무슨 인권이', '테러범에게 무슨 적법절차가', '수형자에게 무슨 행복추구권이'라고 말하기 시작할 때, 파국은 시작된다. 왜냐하면 살인자가 된다는 것, 테러범이 된다는 것, 수형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고도로 정치적인 문제이며, 매우 자주 강자의 논리와 성급한 여론과 부족한 증거에 근거를 두기 때문이다.

'기본적 인권'의 원리와 제도는 정치적 견해, 눈에 보이는 현상, 자명한 정의감, 그리고 참을 수 없는 복수심에 양보할 수 없는 인간의 보편적 권리를 인정하지 않을 때, 인류가 위험에 빠진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경험하면서 발전해 왔다.

스필버그의 영화들을 지지하지 않지만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흥미롭게 보았다. 범죄에 대한 정확한 예언에 따라 잠재적 범죄자들을 체포하는 경찰관인 톰 크루즈는 <친절한 금자씨>의 부모들과 비슷한 상황에 빠진다. 경찰관인 자신이 도리어 살인을 저지를 것이라는 예언을 믿지 않던 톰 크루즈는 수년 전에 아들을 유괴하여 죽였다는 자와 갑자기 직면하자 딜레마에 빠진다.

총을 들이댄 짧고도 긴 고뇌의 시간 끝에 톰 크루즈는 사적인 복수를 단념한다. 그리고 분노에 치를 떨며 미란다 원칙을 말해 준다. 바로 그때 톰 크루즈는 결정론적인 세계를 초월하고,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도약한다. 개인에게도, 국가에게도, 인류에게도 그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야만에서 문명으로 진화하는 가장 연금술적인 순간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하는 월간 <인권>에 실려 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행하는 <월간 인권>의 주요기사를 오마이뉴스에 게재하고, 우리 사회 주요 인권현안에 대한 인권위의 의견 등을 네티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꾸벅...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