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9돌 한글날을 맞아 참으로 풍성한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그런 사이에 우리들의 관심을 끌게 하는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한 행사가 여주 영릉에서 있었다. 그것은 바로 50여년 한글을 연구해온 해외 석학들이 세종대왕이 잠들어 계신 영릉을 참배한 일이다.
그들은 일본의 우메다 히로유끼(梅田博之) 레이타쿠 대학교 총장과 독일의 베르너 삿세(Werner Sasse) 함부르크 대학 동양학연구소 교수이다. 지난 6일에 있었던 한글문화 정보화 포럼에서 초청강연을 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영릉참배에 더욱 의의를 두고 있었다.
7일 아침 10시에 호텔에서 버스를 타고 출발했는데 이동 중에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먼저 우메다 히로유끼 총장과 인터뷰를 시작했다. 우메다 총장은 한글과의 처음 만남이 도쿄대학교 3학년 때 언어학을 전공으로 선택하면서부터였으며, 그 뒤 50여년을 한글과 함께 했다고 한다. 반세기를 한글과 함께 한 것이다.
"한글은 음소문자이면서, 음운자질을 가지고 있다. 또 모아쓰기를 하지만 음소문자이기 때문에 내부의 구조를 알 수 있다. 즉, 단어와 형태소 등 문법단위의 경계를 분명히 한다. 다시 말하면 어간과 어미의 구별이 확실한 구조이다. 이러한 자질문자는 가르치기 쉽고, 배우기 쉽고, 쓰기도 좋다. 이에 비하면, 일본의 가나문자는 음절문자일 뿐 특이한 방법을 쓰기 때문에 설명하기가 어려워서 로마자로 대신하고 있다.
한마디로 한글은 최고의 글자이다. 이집트의 '하이로그리프문자(Hieroglypg:신성한 조각문자, 聖刻文字)'는 신권의 상징이며, 왕의 권위를 과시하는 문자이다. 또 문자구조가 복잡해서 배워서 쓰는 게 어렵다. 하지만 훈민정음은 세종대왕께서 글 모르는 백성을 위해 일상생활의 편리를 꾀하고자 만드신 것으로 의의가 크다. 결국 훈민정음은 세계 어떤 글자와도 비교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글자임이 분명하다.
과학과 철학을 아우르고, 그러면서도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것은 물론 가르치기도 쉽다. 그것은 어학적으로도 대단히 뛰어나다는 것을 뜻한다. 더구나 만든 의도가 백성들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감탄을 금할 수 없다."
한글에 대한 신념이 절절히 묻어나 신앙으로 느낄 정도였다. 유창한 한국말로 거침없이 질문에 대답했다.
- 한국어를 배우는데 가장 큰 도움은 무엇이었나?
"어쩌면 운명이었다. 나는 하버드대학교 옌칭연구소 일-한-중 교류프로그램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여기서 연구비를 받아 서울대학교 이숭녕 교수에게 공부했다. 또 이기문, 김석득 선생 등 많은 학자와의 교류하며 좋은 인간관계를 맺었다. 한국 사람들은 훌륭한 인격을 소유한 분들이었다. 그 분들과 알았다는 것이 오늘의 내가 있게 바탕이다."
- NHK방송에서 맨 처음 한글강좌를 시작한 것으로 아는데.
"한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간 뒤 나는 아시아아프리카언어문화연구소 소장이 되었는데 1984년 NHK에서 한국어 강좌를 해달라는 제의를 해왔다. 이때부터 5년간 강좌를 진행했다. 일본 사회에 한국과 한국어를 널리 알리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평생교육 차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뿌린 씨앗이 이 정도로 번성할 줄은 몰랐다. 큰 보람이 되었다."
- 지금 한류열풍이 굉장한데 한국어학자의 처지에서 앞으로 어떻게 될 것으로 보는가?
"겨울연가로 시작된 한류열풍은 겨울연가가 일본과 비슷한 분위기 또는 좀 더 앞선 상황이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하여 일시적일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그 뒤 분위기도, 배경도 일본과는 전혀 다른 대장금이 성공하는 것을 보고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더욱 지속될 것이란 확신을 갖게 됐다. 지금 일본 곳곳에 가면 한글간판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한국어학자로서는 뿌듯할 수밖에 없다."
그는 인터뷰를 끝마치면서 한국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는 흐뭇하며 한국 사람은 존경과 사랑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88올림픽 이후 한국의 발전은 놀라울 정도지만 예전의 구수한 냄새는 없어진 듯해 아쉽다고 한다. 따뜻한 손을 지닌 할아버지를 대한 느낌으로 인터뷰를 마쳤다.
이어서 파란 눈의 베르너 삿세 교수와 인터뷰를 했다. 삿세 교수는 '월인청강지곡'을 독일어로 번역할 정도로 뛰어난 한글 사랑과 학식을 지니고 있다. 잘 웃고, 농담에도 거침이 없어 학자라기보다는 이웃집 아저씨를 연상케 한다.
"한글은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창조물이며, 철학적, 과학적 결과물이다. 모음은 음양철학을, 자음은 오행철학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어서 음운현상에 철학을 이입시켰다. 한글은 전통철학이 과학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다. 태극기에 경의를 표하는 것은 한글에 경의를 표하는 것과 같다.
또 한국문화는 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전통문화와 외래문화를 잘 조화해야 하는데 이것의 좋은 예가 훈민정음이다, 한국철학을 배경으로 현대과학에 알맞은 사고방식과 제도를 만든 것이다. 철학과 과학을 조화시킨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위대한 글자다. 한국어를 선택한 것이 자랑스럽다."
역시 삿세 교수도 신앙에 가까울 정도로 한글을 극찬한다.
- 어떻게 한국어와 인연을 맺었나?
"60년대 후반에 한국에 사회봉사를 왔다가 자연스럽게 공부를 하게 되었다. 독일로 돌아간 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매력을 느꼈던 한국어를 공부해보고 싶었다. 보쿰대학교의 레빈 교수에게 한국학과 언어학을 배우게 됐다. 그 때 쓴 박사논문은 '계림유사 속의 고려방언'이었으며, 교수자격시험의 논문 제목은 '향가연구'였다."
- 한국의 고서적들을 독일어로 번역했다는 얘길 들었는데.
"같이 연구하고 있는 안정희 교수(한국인으로 독일에 거주)와 함께 5년간의 공동작업 끝에 '월인천강지곡'을 번역할 수 있었다. 특히 특수단어, 불교배경, 문법분석 등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2002년 한국의 소학사란 출판사에서 펴냈다. 지금 이를 이어서 '용비어천가'를 번역하고 있는 중이다. 내년이면 완성돼 책으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 앞으로의 계획은?
"내년에 은퇴하면 한국에 와서 일생동안 공부했지만 끝내지 못한 것들을 완성해낼 것이다. 한국의 문학, 민속학, 역사, 언어학 등을 모두 해볼 생각이다. 한국 문화도 훌륭하지만 사람들도 참 좋다. 나와는 성격이 잘 맞아서 독일보다 한국 친구가 더 많을 정도다. 그래서 한국에 와서 연구하는 것이 즐거울 것이다. 예전에 한국에 있을 때 돈암동 어딘가 막걸리집에 외상을 진 일이 있는데 그것도 갚아야 하겠다."(웃음)
내년에 그가 완전한 한국 사람으로 변신하는지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는 인터뷰를 끝마치면서 한국에 인문학이 위축되면서 저급한 외래문화가 판을 친다며, 전통문화와 외래문화 간에 격차를 줄이고 조화를 꾀해야만 한다고 주문한다.
그 날 두 석학은 영릉 세종대왕 묘에 꽃을 바치고, 향을 피운 채 묵념을 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흠모의 정을 가누지 못하는 듯 오랫동안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리곤 영릉을 돌아보며 세종대왕의 위업을 기리는데 한국인들보다 더한 열의를 보인다. 누가 세종대왕의 후손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참배에 감격해 하고 있다.
그들은 한글인터넷주소추진총연합회 최기호 회장의 안내로 세종대왕 전시장 등을 돌아보며 설명을 들었다. 이 자리에서 최 회장은 세종대왕이 백성들을 위해 측우기 등 농사관련 기기들을 발명하고 천상열차지도를 그려 천문학을 발전시켰으며 고유악기와 세종악보(정간보)를 만들어 향악을 집대성하고 최고의 글자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며 그야말로 천재였음을 강조했다.
이에 그들은 맞장구치기에 바빴고, 신이 난 듯 보였다.
영릉 참배를 한 그날 저녁 두 석학은 세종연구소 이기남 이사장, 독일 출신 한국인인 기아자동차 이참 고문 등과 함께 식사를 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세종연구소가 글이 없는 민족에게 한글을 모국어로 만들어주는 일을 하는 것에 박수를 보냈다.
이 자리에서 이참씨는 다른 민족의 말을 모두 표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한글 자모를 더 만들 필요는 없다고 했으며, 이에 두 석학을 비롯한 참석자 모두 적극 공감했다.
두 석학과 이참씨는 영릉을 2천여 평방미터의 좁은 장소에 보잘 것없이 방치하지 말고, 청계천 복원에 든 비용의 10배 이상의 돈을 들여 국가적 사업으로 단장해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한국 최고의 문화유산이며, 가장 강력한 국가 경쟁도구인 한글의 창시자 묘역을 그렇게 소홀히 놔둔데 대한 질책인 것이다.
정말 작지만 작지 않은, 아니 우리 국민이 깜짝 놀라야할 일이 7일 영릉에서 벌어진 것이다. 국민 중 우리 겨레에게 커다란 은혜를 베풀어준 세종대왕이 잠들어 계신 영릉을 참배한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있을지, 아니 세종임금이 어디에 잠들고 계신지 정도라도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의심스러운 이 때에 머리가 희끗한 외국의 노학자들이 참배를 위해 먼 길을 애써 온 것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