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서울에선 중화권 거상들이 총집결한 '화상(華商)대회'가 한창이다.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나날이 영향력을 키우고 있는 화상들이, 최근 중국의 중요한 경제 상대국으로 떠오른 한국에서 대회를 연다는 건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중국산 농수산물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여전하다. 또 국내기업의 활발한 중국 진출이 오히려 국내 제조업 공동화를 초래한다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혹자는 역사적으로 한국은 중국에 '중독돼 있다'고 말한다. 문화적 유사성과 활발한 인적 교류 때문에 최근 급격하게 가까워지고 있지만 그 '다름'에 대해선 진지한 고민을 할 겨를이 없었다는 것. 이것이 바로 한국 청년 20명이 '중국 중독증 탈출'을 외치며 겁 없이 중국 심장부에 뛰어든 이유다. 21세기 한국에 중요한 기회이자 위협으로 떠오른 중국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려는 흔치 않은 시도였던 셈.
한국산, 베이징을 장악하다?
지난 9월 25일 희뿌연 먼지가 자욱한 베이징 공항에 첫발을 내디딘 청년글로벌리더십 중국연수단원들을 맞은 것은 낯선 이국 풍경이 아니었다. 삼성과 LG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공항 로비 텔레비전부터, 금방 공장에서 출고된 듯한 북경현대자동차의 '엘란트라(국산 아반떼 모델)' 택시 행렬, 그리고 한국 관광객들을 기다리는 수십 대에 이르는 관광버스들까지, 마치 한국의 대도시를 찾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뿌듯함도 잠시, 이들은 잠시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첫 인상만 놓고 본다면 오히려 중국이 한국에 중독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중국공산당의 주도 아래 진행된 개혁개방정책은 20여년 사이 중국을 몰라보게 바꿔놓았다. 7년 만에 연수단 일원으로 베이징을 찾은 박유경(34)씨는 "그때만 해도 베이징 거리는 온통 인민복 입은 사람들과 자전거들이 넘쳐났다"면서, 자전거를 밀어내고 심한 교통체증을 일으키는 자가용들의 행렬과, 저마다 개성있는 옷차림과 머리모양새를 하고 있는 '21세기' 베이징 시민들의 모습에 크게 당혹해 했다.
특히 동방명주와 진마워타워로 대표되는 상하이 푸둥경제특구의 화려한 야경은 무역량과 외자유치규모에서 세계 수위권을 달리며 고속성장하고 있는 '자본주의 국가' 중국의 현재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공산당 일당독재의 사회주의 정치체제를 고수하면서도 경제적으로 자본주의를 도입한 중국에게 한국의 '자본주의 문화'는 좋은 본보기임에 틀림없다.
"한국, 무조건 좋아요!"
"먼저 중국 젊은이들과 부딪히는 게 순서가 아닐까?"
지난 9월 28일 오후 LG전자의 대형 광고판이 바라보이는 베이징 번화가 왕푸징 거리. 비디오카메라를 든 연수단원들이 오가는 중국 젊은이들을 붙잡고 인터뷰를 시도하고 있었다.
그동안 중앙일간지 베이징 특파원, 중국공산당학교 교수, 중화전국청년연합회 간부 등 굵직굵직한 현지 인사들을 만나 강연을 듣고 얘기를 나눴음에도 갈증을 못 채운 연수단원들이 직접 현지인들과 부딪혀 보기로 작정한 것이다.
한류 덕분일까? 한국 하면 한복과 요리, 화장품이 떠오른다는 20대 초반 여성 일행은 '한궈[韓國]'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많은 말들을 쏟아냈다. 결론은 한국은 무조건 좋다는 것. 특히 장나라, 배용준 등이 나오는 한국 드라마를 좋아한다고. 특히 베이징 젊은이들은 최근 중국 위성방송을 통해 방영되는 한국드라마 <대장금>을 계기로 한국 전통요리나 한복에 대해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이런 중국 젊은이들의 '중독' 현상에, 다음날 상하이 연수단 숙소에서 만난 서청(41) 상하이YMCA 간사는 "월드컵 응원 모습이나 드라마 등 TV를 통해 비치는 한국의 모습들이 중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있다"고 말한다. 덩달아 한국 상품 이미지도 좋아지고 있고, 한국에 유학가려는 학생도 늘어나고 있다는 것. 하지만 "만약 30년 뒤에도 (이런 현상이) 계속될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하기엔 이르다. 어디까지나 지금 시대 사람들의 단편적인 모습일 뿐"며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거꾸로 중국인, 중국문화에 대한 한국인의 부정적 인상은 활발한 문화 교류를 가로막고 있다. 아직 자본주의 습성이 덜 밴 탓에 딱딱하고 불친절한 호텔이나 식당 종업원, 신호등이나 보행자는 아랑곳 않는 난폭한 운전 문화나 길거리에 침이나 오물을 함부로 버리는 관습, 노점뿐 아니라 시장까지 장악한 '명품 짝퉁' 등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하지만 서청 간사는 "더럽다, 안 씻는다, 불친절하다 등 중국인에 대한 부정적 인상은 머릿속의 관념일 뿐, 개방되면서 많이 사라지고 있다"면서 이를 문화적 차이로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중국 문화에 대한 편견부터 벗어라
처음 중국을 찾은 최정은(28 연세대 대학원 중국지역학 전공)씨 역시 "중국 하면 지저분한 거리나 개방 화장실만 떠올렸는데 이번 연수를 계기로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켰다"고 말한다. 특히 차량이 통제된 상하이 외탄 밤거리를 자유롭게 활보하는 중국인들의 모습에서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편견도 버리게 됐다고.
순천YMCA 활동가 고상연(34)씨는 "10번 가까이 중국을 찾았지만 이번처럼 공산당 간부나 당교 교수, 특파원 등 중국 정치경제분야 전문가들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며 "중국의 현재 모습을 들으며, 피상적이기만 했던 중국의 실체를 한 껍질 벗겨내는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연수단장을 맡은 박영철(39) KYC본부 공동대표는 "1주일 연수만으로 중국을 알기는 어렵지만 각자가 중국과 함께 풀어갈 자기 역할을 고민하고, 과제 하나씩을 가져간다는데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역시 연수단 일원으로 참가한 이동기(43) 영남대 교수는 "이번 연수는 '중국대륙에 바늘구멍 뚫는 것에 불과'하다"면서 "그만큼 겸손하게 접근하고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한중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중국을 반면교사 삼아 한국의 정체성을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자장면이 한중문화교류 본보기 될까?
지난 5천년간 중국 문화가 한국에 일방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면, 개혁개방 이후 최근 20여년은 일찍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한국 문화가 중국에 일방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상황이다. 서청 간사는 이러한 '문화 역류'가 단기적 현상에 그치지 않으려면 지금처럼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쌍방향 교류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매일 한국사람 다섯 중 하나가 먹는다는 자장면이 최근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고 한다. 많이 알려졌듯이 자장면은 일반적인 중국요리는 아니다. 화교를 통해 들어온 '춘장'이라는 중국 음식문화와 한국인의 입맛이 만나, 이제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대중음식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앞으로 한중 문화가 일방적인 '중독현상'에서 벗어나 쌍방향 교류가 활발해 질 때 어떤 창조적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을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이 자장면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