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몹시 피곤했다. 오늘이 바로 학교에서 미천골로 그림 그리러 가는 날이라 일어나 김밥을 싸야 한다는 생각과 일요일이니까 늦잠 좀 잤으면 정말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이 교차했다. 어쩌겠는가, 해야 할 일은 할 수밖에 없는 것을. 피로와 게으름을 물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원도 속초교육청에서 '우리 숲 탐구대회'를 개최했다. 속초와 양양지역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중 희망자에 한해 미천골로 가서 꽃그림을 그리고 부모들은 꽃 사진을 찍고, 또 가족이 함께 미천골에 자생하는 나무에 대해 알아보는 행사에 아이가 신청을 했던 것이다. 아이들은 며칠 전부터 들떠 있었다. 교육청에서 준비한 관광버스를 타고 미천골로 간다는 게 30분 거리의 짧은 여행이지만 기분은 2박 3일 여행에 버금가는 것 같았다.
남편까지 가게 됐으니 가족 나들이였다. 내 한 몸 희생해서 가족들에게 즐거운 나들이를 경험시켜야겠다는 사명감을 안고 김밥에 장떡까지 구웠다. 오징어와 부추를 넣고 장떡을 구워 한 통 담고 김밥도 담고 과일에 과자까지 싸니 한 가방 됐다. 그걸 들고 올라갈 남편은 고생 좀 할 것 같았다.
남편은 차에서 내렸을 때 '우리나라에서 아마도 제일 아름다운 곳일 것 같다'며 들떠있었다.
"지금 무슨 소리 안 들리니?"
남편은 아이들한테 들려오는 소리에 대한 질문을 했다. 산 중에서만 들을 수 있는 소리를 귀기울여 듣게 하기 위해 그런 질문을 하는 것 같았다. 큰 애가 곧장 물소리가 들린다고 대답했다. 작은 애는 까마귀 소리가 들린다고 대답했다.
우리가 걸어 올라가는 길 옆으로 계곡이 있어 물소리가 요란했는데도 사진 찍는 데만 정신이 팔려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던 내 귀에 갑자기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귀가 있다고 다 듣는 게 아니라 마음이 가 있어야 들린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까마귀들도 심심찮게 머리 위에서 날아다니며 "까아악 까아악" 거렸다. 귀가 있으면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소린데 나에겐 아이들의 대답이 참으로 귀하게 들렸다. 그 이유는 마음이 지금 이 순간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또한 들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마음은 언제나 현재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어른인 내가 놓치는 것들을 참으로 많이 챙기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열에서 우리 가족이 가장 처졌다. 남편은 짐이 무겁다고 여전히 입이 한 다발은 나와 있다. "도대체 뭐를 쌌기에 이렇게 무거워?"하며 급기야 아침부터 음식 만드느라 생고생한 나를 원망하는 기색까지 보였다. 예전 같으면 시비 거리가 충분히 돼서 말다툼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이젠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한다는 말이 어느 시점에서 짜증을 내고 언제쯤이면 풀리고, 왜 짜증을 내고, 이런 걸 알아냈다는 뜻이다. 엄마가 어린 애기가 울면 배가 고프구나, 기저귀가 젖었구나, 하는 것처럼 짜증을 내는 이유를 알기에 짜증을 내도 별로 화도 안 났다.
우리 가족은 기가 부족했다. 여행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데, 무거운 짐을 들고 햇빛 아래서 장시간 걸어 올라가니까 에너지가 딸려서 잠투정하는 애들처럼 신경이 날카로워졌던 것이다. 짐을 반 나눠 들어주자 남편의 짜증은 좀 수그러들었는데, 이제는 큰 애가 신경질을 냈다. 걷는 게 힘들다며 신경이 몹시 날카로워져 있었다. 작은 애만 활기 있게 앞에서 잘도 걸어갔다.
3km 정도를 걸은 것 같다. 미천골 초입에서 선림원지까지. 산림원지에 집결해서 점심을 먹었다. 아침 일찍 음식 만드느라 고생한 나와 들고 오느라 고생한 남편의 고생이 보답을 받는 순간이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은 참으로 맞는 말이다. 점심을 맛있게 먹고 나니까 다들 활기를 찾았다. 남편도 큰 애도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오늘의 과제인 꽃 사진은 내가 맡고, 남편은 나무를 찾아서 숲 해설가로부터 나무의 이름과 특징에 대해서 들으면서 그걸 꼼꼼하게 기록하고 아이들은 보랏빛의 길쭉한 야생화, 꽃향유 앞에서 그림을 그렸다.
꽃 사진은 처음 찍어봤다. 일반 사진처럼 멀찍이서 찍고 있었다. 몇 장 찍고 나니까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 옆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아저씨의 폼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꽃에 사진기를 거의 밀착시켜서 찍는 것이다.
나도 따라 해봤다. 디카를 꽃에 밀착시키고 있다가 가장 선명한 장면이 나왔을 때 찍으니까 꽃의 새로운 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훨씬 예쁜 사진이 만들어졌다. 한 시간이 금방 지나가버렸다. 사진 찍기에 재미가 붙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찍었다.
남편 또한 숲 해설가로부터 나무에 대해 설명을 들으면서 질문지를 작성하고 있는 모습이 나름대로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정말 중요한 프로젝트라도 맡은 사람 마냥 나뭇잎을 만지고 줄기를 쓰다듬고 하면서 나무에 대해 알아가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아이들의 꽃그림도 그냥 꽃을 빨갛고 노랗게 대충 그리는 게 아니라 잎맥이나 꽃술도 꼼꼼하게 그려야 하는, 즉 꽃 세밀화를 그려야 했다. 처음에는 어떻게 그릴지 몰라 난감해 하더니 이내 감을 잡은 듯 정말 열심히 그리기 시작했다. 내가 디카에서 재미를 발견했듯 아이들도 그림 그리기에 푹 빠져들었다. 내가 그린다 해도 더 잘 그리기 어려울 만큼 잘 그려내고 있었다.
아쉬운 점은 아이들이 그려놓은 그림을 사진으로 찍지 못했던 게 아쉽다. 이미 제출해버리고 한참 내려오다가 그 생각이 났다. 내려오는 길은 짐도 가볍고, 임무도 완수해서 한결 기분이 좋았다.
양양 미천골 자연휴양림은 아름다운 계곡과 울창한 숲으로 이뤄져 있다. 계곡은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을 만큼 수량이 풍부한 편이고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크고 작은 폭포를 만날 수 있는데 매우 아름답다. 숲은 아직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지 않아 옛날 숲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평균 수명 50년 이상의 활엽수 천연림으로 삼림욕을 즐길 수 있고, 야생동식물도 볼 수 있다.
휴양림 내에는 신라시대 고적인 선림원지가 있고 불바라기 약수터와 재래봉(토종벌)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곳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