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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림길

"답답하오이다."

임경업이 마련해 준 처소에서 조용히 몸을 두고 있은 지 세 달째. 계화는 차예량을 보자마자 인사 대신 첫마디를 이렇게 늘어 놓았다. 이러한 한탄을 듣는 차예량의 심정도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지만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형인 차충량은 심양으로 잡혀간 후 소식이 없었고 장판수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되었으며 명으로 간 최효일 역시 아무런 소문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계화야."
"예."

언제나 하인이 날라다 오는 소박한 조반을 먹은 뒤 차예량은 계화를 앞에 두고 솔직한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기로 하였다.

"일전에 네가 말한 연판장이 있지 않느냐? 그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이런 고생을 하는 게 헛된 일이 아니냐?"

계화는 고개를 아래로 숙인 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형님을 볼 면목이 없지만 내 항상 생각해 온 바가 있다."

차예량은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 계화는 조바심이 났는지 차예량의 말을 기다리지 못했다.

"그것이 무엇인지요?"
"...... 모든 것을 잊고 삼남의 아무 곳으로나 내려가 조용히 살아가는 것이 어떠하냐?"

차예량은 이런 말을 내뱉어 놓고서 계화의 표정을 차분히 살펴보았다.

"저 때문에 그러신다면 옳지 않은 말입니다. 그래서야 어찌 편히 살아가겠습니까?"

계화의 대답을 들은 차예량은 속으로 금세 후회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차예량은 자신의 자존심을 다시 찾을 만한 말을 생각해 내려 애를 쓰기 시작했다.

"...... 여기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일단 빠져나가고 보자는 말이었다."

계화는 고개를 들어 차예량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저를 두고 혼자 가시옵소서. 무엇하러 저 같은 계집에 연연하시는 겁니까?"

계화의 당돌한 대답에 이리저리 망신만 당한 차예량이었지만 기실 자기 딴에는 계화를 생각해 한 말이었기에 섭섭함을 감출 수 없어 버럭 소리를 질러대었다.

"나인들 어찌 하고 싶지 않아 이러겠느냐! 돌아가신 황일호 나으리와 형님의 일만 생각하면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더욱 더 한이 맺히고 분이 차는 것이니라!"

차예량은 휙 하니 방으로 돌아가 읽고 또 읽어 귀퉁이가 닳아 빠진 사마천의 사기 <자객열전> 편을 펼쳐 들었다. 그 중에서 차예량이 좋아하는 대목은 바로 진시황을 암살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형가의 이야기였는데 지금은 그 대목마저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한숨만 터져 나올 뿐이었다.

"이 따위 글로 자신을 위안하려 하다니 참으로 나는 졸장부가 아닌가!"

차예량은 누가 듣거나 말거나 크게 탄식하며 책을 집어 던지고 벌렁 누워 버렸다. 그 때 식사를 날라다주던 하인이 달려와 소식을 전하였다.

"아뢰옵니다. 부윤께서 어르신을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그 말에 차예량은 부스스 일어나 의관을 갖추어 입으며 중얼거렸다.

"내, 그 분이 날 잊고 있었던 줄만 알았더니 이러한 내 기분을 헤아리기라도 했는가. 괜히 헛된 술자리는 아니었으면 좋으련만."

차예량의 혼잣말을 우두커니 서서 듣고 있던 하인이 넌지시 일러주었다.

"어떤 선비와 거지가 찾아왔더이다."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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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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