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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성영
요즘 매일 같이 아이들과 나란히 이른 아침 산책길에 나섭니다. 계룡산 저 만치에 아직 해가 떠오르기 전입니다. 산책길 중간에 다 늙은 장승이 반깁니다. 아이들과 산책길을 나설 때마다 언제나 늙은 장승에게 인사말을 건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오~오냐."

대답은 늘 그랬듯이 아빠인 내가 대신 합니다.

ⓒ 송성영
산책길 끄트머리에 도달하면 계룡산 문필봉 쪽에서 아침 해가 고개를 비쭉이 내밀고 들녘에는 벼가 누렇게 일어섭니다. 씽씽한 공기의 입자들은 가는 바람을 타고 코끝으로 상큼하게 다가옵니다. 잠에 덜 깬 머릿속이 아주아주 맑아집니다. 몸은 한결 가벼워지고요.

"아빠, 저기 새 있어."

앞서 가던 아이들이 논두렁 옆 수로에 온통 하얀 깃털을 지닌 새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바싹 다가갔지만 날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어기적거립니다. 때마침 아침 풍경을 찍기 위해 가지고 나온 카메라를 급히 들이댔습니다. 물에 빠진 새처럼 어기적거리고만 있는 녀석은 백로인 듯했습니다. 긴 발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농약을 먹었나 보다."

어느 곳 하나 상처 난 곳도 없이 다리 힘이 쏙 빠져 있는 것으로 봐서 농약에 저린 먹이를 먹은 게 분명했습니다.

"데리고 가서 치료해 주자."

아이들이 조심스럽게 백로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아이들이 조심스럽게 백로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 송성영
아이들은 긴 부리에 쪼일까봐 조심스럽게 백로의 날개를 잡아 산책길을 되돌아 왔습니다.

오던 길에 다시 개울을 건너는 다리를 만났습니다. 다리 옆에는 우리가 경작하고 있는 벼논이 있습니다. 한창 고개를 숙이고 있는 벼논은 농약 한 방울 뿌리지 않았습니다.

"안되겠어, 여기다 놓고 가자. 데리고 간다 해서 아빠가 치료해줄 수도 없고, 스스로 치료해야 할 것 같은디."
"아빠, 그냥 데리고 가자. 여기다 놓으면 도둑 고양이들에게 잡아 먹힐껴. 여기 도둑고양이들 많단 말여."

생각해 보니 아이들 말이 맞았습니다. 이 상태로는 먹이를 잡아먹을 수도 없고 하니 우선 집에 데리고 가서 먹이라도 먹이자 싶어 논 가장자리에 풀어 놓았던 녀석을 데리고 집으로 왔습니다.

논에 놓아 두려고 하다가 다시 데려 가기로 했습니다.
논에 놓아 두려고 하다가 다시 데려 가기로 했습니다. ⓒ 송성영
아이들은 학교 갈 준비를 서두르고 아빠인 나는 닭장 앞에서 지렁이를 잡아다가 녀석 앞에 놓았습니다. 지렁이를 녀석 앞에 대령했지만 먹을 생각조차 안 합니다.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우리집 고양이, '웃기는 놈'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우리집 고양이, '웃기는 놈' ⓒ 송성영
옆에서 지켜보던 우리 집 고양이 '웃기는 놈'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산비탈에서 물까치도 잡아먹을 수 있을 만치 사냥 솜씨가 만만치 않은 녀석이니 웬 떡인가 싶었겠지요.

잠깐 사이 딴 데를 보고 있는데 백로를 향해 휙 휙 앞발을 휘둘러댑니다. 그러다가 엄청 아프게 알 밤 한 대를 얻어맞고 저만치로 달아나 아쉬운 듯 물끄러미 쳐다봅니다.

호되게 혼줄이 나서야 포기한 '웃기는 놈'
호되게 혼줄이 나서야 포기한 '웃기는 놈' ⓒ 송성영
'웃기는 놈'을 쫓다가 불현듯 생각난 것이 있었습니다. 천연녹즙이었습니다. 나는 독이 들어 있는 농약 대신 천연녹즙, 생물을 살리는 진짜배기 농약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집 주변에서 널려 있는 으름 열매로 담은 천연녹즙이 한 단지나 있었습니다.

천연녹즙 중에서 으름 열매로 담근 것이 최고라고 합니다. 사람에게도 아주 좋답니다. 특히 양기를 돋우는데 아주 좋은 녹즙이라고 합니다. 나는 이 으름 효소를 농약 대신 야채에 뿌려 주면서 갈증이 생기면 마시기도 합니다. 기운을 돋우는 데는 그만입니다.

천연 녹즙 으름 효소를 억지로 먹였습니다.
천연 녹즙 으름 효소를 억지로 먹였습니다. ⓒ 송성영
발버둥 치는 백로 녀석의 긴 부리를 억지로 벌리고 으름 효소를 입 안 깊숙이 집어넣었습니다. 소주잔으로 한 잔 정도의 분량을 먹였습니다. 먹이고 나니 계속해서 묽은 똥을 솟아냈습니다. 조짐이 좋았습니다. 독약을 먹은 사람들에게 위 세척을 하는 그런 느낌이었으니까요. 물론 한 번도 그렇게 해본 일은 없지만요.

때마침 우리 집에 다니러 오신 엄니께서 어린아이처럼 백로에게 말을 건넵니다.

"백로야, 얼릉 기운 챙겨서 훨훨 날아가라. 잉."

엄니가 백로에게 "얼릉 기운 채려야' 그러십니다.
엄니가 백로에게 "얼릉 기운 채려야' 그러십니다. ⓒ 송성영
백로 녀석을 마당에 풀어 놓으면 고양이 녀석에게 언제 어느 때 습격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외발 손수레 안에 넣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으름 효소를 마시고 한 시간도 채 안 돼서 녀석의 움직임이 훨씬 좋아졌습니다.

천연녹즙 으름 효소를 먹고 기운을 챙긴 백로
천연녹즙 으름 효소를 먹고 기운을 챙긴 백로 ⓒ 송성영
기운이 생기는지 백로 녀석이 날개짓을 하며 손수레 밖으로 나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날지 못해 마당에 쪼그려 앉아 있습니다. 고양이 때문에 다시 넣어 놓기를 반복하다가 언제까지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어 병아리를 키우던 닭장 속에 넣어 두었습니다. 거기에 지렁이와 작은 물고기도 넣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룻밤을 보낸 다음날 이른 아침, 백로 녀석을 본래 있던 곳으로 데려다 주기 위해 닭장으로 다가갔습니다. 닭장 안에 넣어 주었던 작은 물고기는 온 데 간 데 없었습니다. 전날 저녁 때까지는 입에도 대지 않았는데 밤 사이에 백로 녀석이 먹은 게 분명했습니다.

녀석을 닭장에서 꺼내려고 가만히 날개를 잡는데 힘이 부쩍 생겼습니다. 부리로 손을 쪼으려 했습니다. 어느 정도 힘이 생겼는지 실험하기 위해 마당 쪽으로 휙 던져 놓았습니다. 그러자 녀석은 날개를 힘차게 펼치고 휙 하니 바람 소리를 내며 지붕 위를 훨씬 넘어서 저만치 집 밖으로 날아갔습니다.

ⓒ 송성영
동구 밖 더 멀리, 앞산으로 까마득하게 날아갔습니다. 아주 멀리 날아갔습니다. 새가 이렇게 멋지게도 날아갈 수 있구나, 싶을 정도로 멋지게 날아갔습니다.

작별 사진을 찍어 놓지 못해 못내 아쉬웠지만 참 기분이 좋았습니다. 작별인사도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린 녀석이 섭섭했지만 가슴이 시원했습니다. 내가 닭장 속에서 막 빠져 나온 것처럼 시원했습니다.

백로가 기운을 챙겨 멀리 멀리 날아갔다고 했더니 아이들도 좋아 하고 아내도 좋아하고 팔순을 바라보시는 엄니께서도 마냥 좋아 하십니다.

"어이구, 잘했다. 애비야, 니가 한 생명 살렸다. 어이구, 잘했다. 잘 날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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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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