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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명분만을 내세워서가 아니라 전략상으로도 명과 더불어 동시에 앞과 뒤를 치면 청이 어찌 막아내겠나?"
차충량의 말에 장판수는 단호히 대꾸했다.
"그렇다면 청의 홍타이지까지 조선 땅에 들어와 남한산성까지 내려 왔을 때 명은 대체 뭘 하고 있었다는 겝네까? 내래 들은 말로는 산해관 하나를 믿고 겨우 버티는 것이 명의 실정이라 들었습네다."
"그야 워낙 청의 군대가 신속하게 밀고 들어와 미처 원군을 청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조정에서는 명의 조정을 믿기 보다는 가도의 도독인지 도둑놈인지 하는 모문룡을 지원하다가 헛되이 재물만 날리고 아무런 득을 얻지 못했습네다. 차라리 그 재물로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말을 살찌웠다면 어찌 오늘과 같은 일을 당했겠습네까?"
"어허! 이 사람이…!"
차충량과 장판수의 언쟁으로 분위기가 격앙되기 시작하자 임경업이 손을 들어 이를 막은 뒤 장판수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렇다면 이대로 있자는 것인가?"
"아닙네다."
임경업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비록 큰 싸움에서 여러 전공을 세웠다고는 하지만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말단 초관이 뭔가 대단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임경업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술자리 안주거리 삼을 말은 나오겠거니 하는 심정으로 임경업은 다시 물어보았다.
"그렇다면 좋은 방책이 있는가?"
"있습네다. 내 듣자하니 명의 도움을 바라고 장사로 벌어들인 많은 재물을 실어 최효일을 중국 남쪽으로 보냈다고 들었습네다."
"그러한데?"
차충량이 이 얘기를 길에서 전한바가 있기에 심통스럽게 중간에 끼어들어 말을 잘랐지만 차예량은 눈짓으로 장판수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자는 심정을 전했다. 그래도 장판수는 그리 불쾌하지 않은 표정으로 혀로 입술을 축인 후 말을 계속했다.
"그런 재물이 있거든 심양에 포로로 잡힌 백성들을 구하소서. 그것이 우선이옵네."
좌중은 잠시 침묵에 휩싸였다. 임경업은 침통한 표정으로 손 하나 까딱 않고 술상을 바라보다가 장판수에게 술잔을 권했다.
"그 말이 맞네! 허나… 이곳을 감시하는 눈길을 무시할 수는 없다네. 청의 관리들도 자주 드나들고 조정에서도 크게 신경을 쓰고 있으니 말일세. 더구나 더욱 큰 문제는 청에서 명나라를 칠 수군을 조련하도록 이곳 의주에 강요하고 있다는 것일세! 그런 기회를 역이용해 볼 작정으로 최효일을 보낸 것이니 장초관이 재물을 포로를 송환하는 데 쓰지 않는다 해서 섭섭하게 여길 것까지는 없네. 나 역시 심양의 사정을 듣고 분한 마음이 치밀어 오르나 재물을 푼다고 해도 얼마나 되는 조정백성들을 구할 수나 있을 것이며 그것이 행여 조정에 누가 되면 어쩌겠나?"
임경업의 말은 소심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장구한 계획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그래도 장판수는 성에 차지 않아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내래 원래 이런 자리에 낄 만한 직위나 신분이 아닙네다. 부윤 나으리의 뜻은 잘 알겠으나 제가 이를 따를 것까지는 없는 것 같습네다. 결례를 용서하소서."
장판수가 나가려 하자 임경업을 볼 낯이 부끄러워진 차충량이 벌떡 일어서 그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임경업은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초관이 내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듯 하네! 그도 중요하나 이런 일은 또 어떠한가? 내 그들이 몸을 조심하는 바람에 오늘에야 소식을 들었지만 청나라 차사 양서지와 정명수, 그리고 일전에 황일호를 살해한 박노와 박시라는 놈이 여러 사람과 함께 의주를 거쳐 한양으로 간다고 들었네."
그 말에 장판수의 몸이 멈칫거렸고 차충량과 차예량도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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