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가 '국민'의 이름으로 물었다. 천정배 법무장관의 지휘권 발동 파문에 대한 질문이다. "국민이 현 정권한테 묻는 다섯 가지 질문"이라고 한다. 질문 가짓수는 다섯 개이지만 따지고 보면 두 개다.
첫째 질문.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은 송두율 사건과 관련해서 "법원의 판결을 받아보고 민망스러웠고 국제적으로도 망신스러운 일"이었다고 했는데, 최종 판결도 아닌 고법 판결을 가지고 언제부터 그렇게 자성까지 하게 됐는가?
이 질문은 흠잡을 데 없다. '최종 확정판결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한다'는 원칙을 확대적용한 원칙적인 질문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조선일보>부터 내놔야 할 것 같다. 고법 판결은 고사하고 검찰 기소단계부터 범죄 혐의를 대서특필해온 그간의 보도관행은 어떻게 설명하려고 이런 질문을 스스럼없이 던지는가?
첫째 질문에 대한 답은 이 정도로 갈음하자. 중요한 질문은 그게 아니다. <조선일보>는 나머지 네 개의 질문을 통해 집요하게 물었다. 특정 개인, 즉 강정구 교수의 경우에 한해 이 '소동'을 피우는 이유가 뭔가? 혹시 다른 무슨 특별한 정치적 이유라도 있는가? 도대체 노무현 대통령이 생각하는 우리 사회의 가치와 이 시대의 정신은 뭔가?
묻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결론은 이미 제시돼 있다. "한 대학교수의 철부지 같은 혹은 학문적으로 무가치한 발언"을 놓고 현 정권이 지휘권까지 발동한 데에는 "현 정권이 국가보안법을 운용할 의지를 사실상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낸 것이라는 주장이다. 정리하자면 현 정권이 국가보안법을 사문화 또는 무력화하기 위해 정략적으로 '판'을 키웠다는 것이다.
국민들은 <조선>이 한 일을 알고 있다
그럴까? 우선 분명히 할 게 있다. 한 교수의 개인적 의견이 전사회적인 대결구도를 촉발한 점은 맞다. '판'이 필요 이상으로 커진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누가, 왜 판을 키웠는가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다. 아니, '다를 수 있다'가 아니라 '다르다'라고 단정할 정황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강정구 교수 구속 시비는 한 순간에 불거진 일이 아니다.
강 교수가 개인적 의견을 표명했을 때 이를 집요하게 이슈화 시킨 곳은 바로 <조선일보>였고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다른 보수 언론이었다. "한 대학교수의 철부지 같은 혹은 학문적으로 무가치한 발언"이라면서도 이를 종합면에 끌어올려 대서특필한 곳이 <조선일보>였고, 강 교수에 대한 구속 여부와 관련해 '전망 기사'까지 내보낸 곳이 <조선일보>였다. 천 장관이 지휘권을 발동하기 전에 강 교수 구속 시비는 이미 사회의제화 돼 있었다.
그 뿐인가. <한겨레>의 오늘 보도에 따르면 김종빈 전 검찰총장 또한 '판 키우기'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
당초 알려진 것과는 달리 강 교수 수사를 맡았던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가 구속 의견과 함께 '불구속도 무방하다'는 의견을 함께 올렸는데도 김 전 총장(또는 대검)이 구속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강 교수 구속 여부를 놓고 의견이 조정되지 않자 먼저 '서면 지휘'를 요청한 사람도 김 전 총장이라고 한다.
<한겨레>의 보도가 '전언' 형식을 띠고 있어 오보 의구심도 들었지만 오늘 아침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과 인터뷰한 천 장관은 관련 질문에 "내부 논의를 밝히는 건 곤란하다"고 답변했다. 그런 '내부 논의'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발언이다.
이제 정리하자. 누가 판을 키웠는가? <조선일보>를 비롯한 일부 보수 언론이 '바람'을 잡았고 이에 적극 호응한 주체가 김 전 총장(또는 대검) 아니던가? 왜 행위의 결과를 원인으로 둔갑시키는가?
'국민'의 이름을 남발하지도, 오용하지도 말라
<조선일보>는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 썼다"는 투로 비판했지만 이 또한 타당치가 않다. 검찰청법 제8조는 법무장관이 '구체적 사건'에 한해 '검찰총장만을' 지휘하도록 돼 있다. 즉, 법무장관이 지휘권을 행사하기 위해선 특정 사건이 전제돼야 하고 당연히 특정 피의자가 등장해야 한다. "왜 유독 강 교수 건이냐"는 질문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조선일보> 등의 집요한 노력 덕에 강 교수 건이 국보법 개폐 문제로 사회의제화 돼 버렸고, 이른바 '사상범'에 대한 구속 여부가 불구속수사 원칙을 적용하는 범위를 재는 중요한 가늠자로 부상했던 점을 고려할 때 천 장관의 지휘권 발동은 오히려 유효적절했다고 보는 게 맞다.
천 장관의 지휘권 발동은 개별적인 대표사례를 통해 일반적 원칙을 확립하는 데 일조할 수 있는 조치였다.
마지막으로 점검이 필요한 건 '의도성'이다. 이를 두고 <조선일보>는 "현 정권이 국가보안법을 운용할 의지를 사실상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낸 것이라고 했다.
정부여당의 국보법 개폐의견이 '폐지 후 형법 보완'이었던 점을 환기하면 '현 정권'이 국보법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건 맞다. <조선일보> 분석대로 지휘권 발동에 국보법 사문화 의지가 실렸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도매금으로 묶을 필요는 없다. 천 장관은 구속하지 말라고 했지 수사하지 말라고 한 적은 없다. 국보법을 운용할 의지가 없었던 게 아니라 합리적으로 운영하고자 했다.
또, 검찰이 강 교수에 적용하려고 했던 국보법상 죄목은 찬양고무죄였다. 하지만 이 조항은 천 장관의 지휘권 발동을 맹비난하는 한나라당조차 1년 전에 '폐지'로 당론을 정리한 조항이다. 국보법 전체와 국보법상 독소조항은 나눠서 봐야 한다(앞의 두 가지 문제점은 이전의 '뉴스가이드'란을 통해 지적한 바 있으므로 중언부언은 피하자).
<조선일보>는 '국민'의 이름으로 결연하게 물었다. 하지만 그 물음에 '국민의 한 사람'은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당부한다. '국민'을 남발하지도 오용하지도 말라.
[조선일보 사설 - '국민이 현 정권한테 묻는 다섯가지 질문'] 전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