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강 교수 사건과 관련, 참여정부가 판을 키웠다며 의도성에 질문을 던진 <조선일보> 사설.
강 교수 사건과 관련, 참여정부가 판을 키웠다며 의도성에 질문을 던진 <조선일보> 사설. ⓒ <조선일보> PDF

<조선일보>가 '국민'의 이름으로 물었다. 천정배 법무장관의 지휘권 발동 파문에 대한 질문이다. "국민이 현 정권한테 묻는 다섯 가지 질문"이라고 한다. 질문 가짓수는 다섯 개이지만 따지고 보면 두 개다.

첫째 질문.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은 송두율 사건과 관련해서 "법원의 판결을 받아보고 민망스러웠고 국제적으로도 망신스러운 일"이었다고 했는데, 최종 판결도 아닌 고법 판결을 가지고 언제부터 그렇게 자성까지 하게 됐는가?

이 질문은 흠잡을 데 없다. '최종 확정판결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한다'는 원칙을 확대적용한 원칙적인 질문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조선일보>부터 내놔야 할 것 같다. 고법 판결은 고사하고 검찰 기소단계부터 범죄 혐의를 대서특필해온 그간의 보도관행은 어떻게 설명하려고 이런 질문을 스스럼없이 던지는가?

첫째 질문에 대한 답은 이 정도로 갈음하자. 중요한 질문은 그게 아니다. <조선일보>는 나머지 네 개의 질문을 통해 집요하게 물었다. 특정 개인, 즉 강정구 교수의 경우에 한해 이 '소동'을 피우는 이유가 뭔가? 혹시 다른 무슨 특별한 정치적 이유라도 있는가? 도대체 노무현 대통령이 생각하는 우리 사회의 가치와 이 시대의 정신은 뭔가?

묻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결론은 이미 제시돼 있다. "한 대학교수의 철부지 같은 혹은 학문적으로 무가치한 발언"을 놓고 현 정권이 지휘권까지 발동한 데에는 "현 정권이 국가보안법을 운용할 의지를 사실상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낸 것이라는 주장이다. 정리하자면 현 정권이 국가보안법을 사문화 또는 무력화하기 위해 정략적으로 '판'을 키웠다는 것이다.

'6·25는 통일전쟁'이라는 기고문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있는 강정구 동국대 교수가 지난 9월 2일 오전 서울 옥인동 소재 경찰 보안분실에 출두했다. 여러명의 경찰들에 둘러싸인 강정구 교수가 보안분실로 향하고 있다.
'6·25는 통일전쟁'이라는 기고문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있는 강정구 동국대 교수가 지난 9월 2일 오전 서울 옥인동 소재 경찰 보안분실에 출두했다. 여러명의 경찰들에 둘러싸인 강정구 교수가 보안분실로 향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국민들은 <조선>이 한 일을 알고 있다

그럴까? 우선 분명히 할 게 있다. 한 교수의 개인적 의견이 전사회적인 대결구도를 촉발한 점은 맞다. '판'이 필요 이상으로 커진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누가, 왜 판을 키웠는가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다. 아니, '다를 수 있다'가 아니라 '다르다'라고 단정할 정황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강정구 교수 구속 시비는 한 순간에 불거진 일이 아니다.

강 교수가 개인적 의견을 표명했을 때 이를 집요하게 이슈화 시킨 곳은 바로 <조선일보>였고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다른 보수 언론이었다. "한 대학교수의 철부지 같은 혹은 학문적으로 무가치한 발언"이라면서도 이를 종합면에 끌어올려 대서특필한 곳이 <조선일보>였고, 강 교수에 대한 구속 여부와 관련해 '전망 기사'까지 내보낸 곳이 <조선일보>였다. 천 장관이 지휘권을 발동하기 전에 강 교수 구속 시비는 이미 사회의제화 돼 있었다.

그 뿐인가. <한겨레>의 오늘 보도에 따르면 김종빈 전 검찰총장 또한 '판 키우기'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

당초 알려진 것과는 달리 강 교수 수사를 맡았던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가 구속 의견과 함께 '불구속도 무방하다'는 의견을 함께 올렸는데도 김 전 총장(또는 대검)이 구속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강 교수 구속 여부를 놓고 의견이 조정되지 않자 먼저 '서면 지휘'를 요청한 사람도 김 전 총장이라고 한다.

<한겨레>의 보도가 '전언' 형식을 띠고 있어 오보 의구심도 들었지만 오늘 아침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과 인터뷰한 천 장관은 관련 질문에 "내부 논의를 밝히는 건 곤란하다"고 답변했다. 그런 '내부 논의'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발언이다.

이제 정리하자. 누가 판을 키웠는가? <조선일보>를 비롯한 일부 보수 언론이 '바람'을 잡았고 이에 적극 호응한 주체가 김 전 총장(또는 대검) 아니던가? 왜 행위의 결과를 원인으로 둔갑시키는가?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진행하는 가운데 북핵저지시민연대 회원들이 강정구 교수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진행하는 가운데 북핵저지시민연대 회원들이 강정구 교수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국민'의 이름을 남발하지도, 오용하지도 말라

<조선일보>는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 썼다"는 투로 비판했지만 이 또한 타당치가 않다. 검찰청법 제8조는 법무장관이 '구체적 사건'에 한해 '검찰총장만을' 지휘하도록 돼 있다. 즉, 법무장관이 지휘권을 행사하기 위해선 특정 사건이 전제돼야 하고 당연히 특정 피의자가 등장해야 한다. "왜 유독 강 교수 건이냐"는 질문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조선일보> 등의 집요한 노력 덕에 강 교수 건이 국보법 개폐 문제로 사회의제화 돼 버렸고, 이른바 '사상범'에 대한 구속 여부가 불구속수사 원칙을 적용하는 범위를 재는 중요한 가늠자로 부상했던 점을 고려할 때 천 장관의 지휘권 발동은 오히려 유효적절했다고 보는 게 맞다.

천 장관의 지휘권 발동은 개별적인 대표사례를 통해 일반적 원칙을 확립하는 데 일조할 수 있는 조치였다.

마지막으로 점검이 필요한 건 '의도성'이다. 이를 두고 <조선일보>는 "현 정권이 국가보안법을 운용할 의지를 사실상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낸 것이라고 했다.

정부여당의 국보법 개폐의견이 '폐지 후 형법 보완'이었던 점을 환기하면 '현 정권'이 국보법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건 맞다. <조선일보> 분석대로 지휘권 발동에 국보법 사문화 의지가 실렸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도매금으로 묶을 필요는 없다. 천 장관은 구속하지 말라고 했지 수사하지 말라고 한 적은 없다. 국보법을 운용할 의지가 없었던 게 아니라 합리적으로 운영하고자 했다.

또, 검찰이 강 교수에 적용하려고 했던 국보법상 죄목은 찬양고무죄였다. 하지만 이 조항은 천 장관의 지휘권 발동을 맹비난하는 한나라당조차 1년 전에 '폐지'로 당론을 정리한 조항이다. 국보법 전체와 국보법상 독소조항은 나눠서 봐야 한다(앞의 두 가지 문제점은 이전의 '뉴스가이드'란을 통해 지적한 바 있으므로 중언부언은 피하자).

<조선일보>는 '국민'의 이름으로 결연하게 물었다. 하지만 그 물음에 '국민의 한 사람'은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당부한다. '국민'을 남발하지도 오용하지도 말라.

[조선일보 사설 - '국민이 현 정권한테 묻는 다섯가지 질문'] 전문보기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