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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17일 오전 국회 한나라당대표실에서 열린 상임운영위원회의에서 다른 참석자들의 발언을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17일 오전 국회 한나라당대표실에서 열린 상임운영위원회의에서 다른 참석자들의 발언을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작년 여름에도 '국가정체성' 얘기 했었는데…."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강정구 교수사건과 관련해 '국가정체성 문제'를 제기하고 나오자, 한나라당 한 의원은 지난해 여름을 상기시켰다.

지난해 7월 19일 전당대회에서 1위를 차지한 박 대표는 당선 이틀 뒤인 21일 밤 서울 삼성동 자택에서 가진 기자들과의 만찬자리에서 "정부가 국가정체성을 흔드는 상황이 계속되면 야당이 전면전을 선포해야 할 날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며 상생의 정치는 무조건 싸우지 않거나, 정부·여당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날인 22일에도 북한 함정의 서해북방한계선(NLL) 월선 및 우리 해군의 보고누락, 의문사진상규명위의 '전향거부 장기수' 민주화 판정과 일부 조사관의 전력 논란 등을 근거로 '국가정체성'발언을 계속했다.

"요즘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훼손하고 애국세력을 부정하는 우려할 만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다. 지금 영해를 수호하기 위해 본분을 다한 군을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칭찬하기보다는 질책하고, 간첩 혐의로 복역한 사람이 군 장성을 조사하는 등 전세계에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중 어떤 사람은 민주화 인사가 됐다. 대통령과 언론, 군, 검찰이 갈등하는 것으로 보여 국민들이 불안을 느낀다."

지난해 여름을 달궜던 '노무현 정권의 정체성'논란에 대한 한나라당 내의 평가는 그렇게 좋지 않았다. 당 밖으로는 보수세력을 결집시켰고 안으로는 비주류에 대한 지도력을 발휘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었다.

그러나 '독재자의 딸' '5년간 퍼스트레이디역' '정수장학회 문제' 등 유신잔재 청산을 내세운 열린우리당과 당내 비주류의 '과거사'공격을 국가정체성으로 맞받아치면서, 즉 자신의 약점에 대한 공격을 '색깔론'으로 역공하면서 한나라당의 수구 이미지를 강화했다는 비판도 많았다.

원희룡 최고위원은 당시 "국가정체성을 내거는 순간, 견해가 다른 사람들은 없애야 될 세력으로 규정된다"면서 "국가정체성은 '후진기어'"라고 혹평했다. 한 당직자는 "정체성, 사상 논쟁은 관념적이기 쉽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구국기자회견은 어디로 향하나... "국가정체성 논쟁은 건설적"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지난 13일 열린 의원총회에서 천정배 법무장관의 강정구 교수에 대한 불구속 수사 지휘권 발동과 관련한 동료의원들의 발언을 들으며 물을 마시고 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지난 13일 열린 의원총회에서 천정배 법무장관의 강정구 교수에 대한 불구속 수사 지휘권 발동과 관련한 동료의원들의 발언을 들으며 물을 마시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15개월만에 다시 강정구 교수 사건과 관련해 노무현 정권의 '국가정체성' 문제를 들고 나왔다.

박 대표는 17일 아침 당 상임운영위원회에서 "수많은 구속 사건 중에서 유독 강정구 교수 건에 대해서 법무부장관이 이렇게까지 해야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점을 우리는 주목한다"며 "그렇게 꼭 해야하는 이유, 그렇게까지 해서 우리 대한민국 체제 부정하고 도전하는 자를 보호해야할 이유가 무엇이냐 이 점을 우리가 깊이 주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18일 아침에는 이와 관련한 '구국 기자회견'을 열 방침이다. 장외집회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뜻도 밝혔다. '부결'과 그에 따른 '상황종료'가 예상되는 천정배 법무부 장관 해임안이 아니라, 10일도 안 남은 재선거는 물론이고 내년 지방선거 때까지 이번 사건의 불씨를 남겨놓기 위한 의도로 해석된다.

당 지도부와 많은 영남권 의원들은 '적극 찬동'하는 분위기다. 김기춘 여의도연구소장은 "이걸 제기 안하면 야당 대표의 자격이 없다"며 "지금 국가정체성 논쟁은 소모적이지 않고 건설적"이라고 말했다.

당의 다른 주요인사들도 "강정구 구하기나 총장 거취 문제 차원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걸린 문제"(강재섭 원내대표), "나라의 근본이 너무 흔들리니 결연한 자세로 특단의 조치가 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최병국 통합과미래특위위원장), "대한민국의 체제를 수호하려는 세력과 흔들려는 세력의 싸움"(주호영 의원), "단순히 검찰, 법무장관, 총장과의 문제가 아닌 정권 차원을 넘어서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한 근본 문제부터 수립하자"(최연희 법사위원장)는 입장이다.

더 나아가 "주체사상파와의 관련 문제를 적극 제기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박계동 의원은 "천정배 장관의 강정구 교수에 대한 수사지휘권 발동을 비롯한 강 교수와 관련한 일련의 흐름은 현 정권이 주사파 세력과의 연대를 복원하려는 일련의 과정"이라며 "이에 대해 현 정권에게 국가정체성의 문제를 분명히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정체성 논란은 과잉대응, 검찰독립 훼손 문제 들고 나가야"

이와는 반대로 박 대표가 국가정체성을 전면에 내걸고 나선데 대한 반대여론도 형성되고 있다.

원희룡 최고위원은 "천 장관의 개입은 부당한 것"이라고 전제한 뒤 "그러나 천 장관이 강 교수 의견에 동조하거나 기소하지 말자고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국가정체성' 차원으로 접근하는 것은 과잉대응"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사법처리절차가 이념공방으로 변질되면서 극단적인 정치공방이 우려된다"며 "이념차원의 접근이 아니라 검찰과 사법부의 독립·중립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남경필 의원도 "이념대결은 필요한데 이런 식의 국가정체성 논란이 아니라, 경제정책 등에 대한 논란이었으면 좋겠다"며 "검찰 독립성 훼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옳다고 본다"는 입장이다.

남 의원은 "시민사회도 이 문제에 대해 나서고 있기 때문에 한나라당은 반보 정도 늦출 필요가 있다"며 "만약, 후임 총장 인선에서 현 정권이 검찰장악을 위한 코드인사를 할 때는 전면전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두 의원 모두 이번 사건이 10·26 재선거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다. "이미 모여있는 지지세력을 다시 확인하는 수준"이라는 것. 한 당직자도 "당의 수구적 이미지를 강화할 수 있기 때문에, 국가 정체성 문제를 장기적으로 가져가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에 대한 대응차원에서 애초 '헌법수호'를 내걸었다가 이름을 바꾼 '통합과 미래 특위'와 한나라당 소속 법사위 의원들과의 연석회의에서도 "국가 정체성이라는 문제를 국민들이 얼마나 현실의 일로 느낄 것이냐, 노무현 대통령이 자랑해온 '검찰독립'을 스스로 훼손했다는 문제를 내거는 게 낫다"는 이견이 개진된 것으로 알려졌다.

박근혜의 전면전 선언, 이명박 의식 때문?

박 대표가 '국가정체성'을 들고 나온 배경에 대해 '대권 주자간 경쟁'이라는 시각도 제기되고 있다. 박 대표가 청계천 성공으로 상승일로에 있는 이명박 시장에 대한 경쟁 차원에서 이 문제를 걸고 나왔다는 주장이다. "몰리면 세게 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모두 '강경투쟁'을 선언한 박 대표에게 부담되는 대목들이다.

더불어 여권의 선거구제 개편 등 각종 제안에 대해 '경제 위기다, 경제회생이 최우선 과제'라고 맞받아쳐 온 당사자인 박 대표가 '이념과 정체성'이라는 한국 정치의 고전적인 정치공방 레퍼토리를 들고 나온 점도, 거리투쟁을 불사하겠다는 그의 발목을 무겁게 하는 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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