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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숲출판사
역사는 영웅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역사를 만든 것은 영웅들만이 아니었다. 알렉산더 대왕이나 넬슨 제독이 적으로부터 승리를 거둘 수 있는 데는 그의 명을 따르던 군인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산업혁명이 전 세계를 뒤흔드는 데는 제임스 와트의 발명품을 퍼뜨리고 다닌 각종 직업군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그랬다. 영웅을 좋아하는 역사가 침묵해서 그렇지 역사 속에는 많은 이들이 있었다.

토니 로빈슨과 데이비드 윌콕은 이들에게도 발언권을 줘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색적인 분류에 따라서 영웅들의 뒤편에 가려진 이들을 찾아냈다. 영국 역사의 불량직업들을 모아 그 직업으로 연명했던 이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추측해본 것인데 그 시도가 흥미롭기 그지없다. 비록 그 분류가 지은이의 말마따나 주관적인 것일지라도 오늘날의 문명을 만든 밑바닥 직업들의 역사를 살펴보는 시도는 의미심장한 일임에 분명하다.

시도의 첫 작업으로 <불량직업 잔혹사>는 로마가 기세를 부리던 로만브리튼과 앵글로색슨 시대로 눈을 돌리고 있다. 그 시대는 어떤 직업들이 불량직업으로 뽑혔을까? 그 시대에는 구토물 수거인, 금광 광부, 화폐 주조소 직공, 바이킹선 운반인, 길레모 알 수집가 등이 불량직업으로서의 면모를 뽐내고 있다.

이 직업들 모두 피하고 싶을 정도로 고된 노동과 스트레스를 받는 일인데 구체적으로 보면 구토물 수거인 같은 경우 먹고 토하고, 다시 먹고 토하는 그 시대 높은 분들의 찌꺼기를 치우는 일이었으니 불량직업이라 할 만 하고 바이킹선 운반인 같은 경우 무지막지하다고 할 정도로 노동을 해야 하니 불량직업이라 할 만 하다.

중세 시대의 불량직업으로는 갑옷담당종자, 거머리잡이, 여자 마법사, 파이프 롤 필사원 등이 있고 튜더 왕조 시대에는 사형집행인이나 분뇨 수거인, 소년배우, 대청 염색공 등이 있다. 갑옷담당종자 같은 경우 구토물 수거인 만큼이나 난감한 일을 처리해야 했다. 중세 시대 귀족들은 갑옷을 입고 싸움을 했는데 싸움이 길어지다 보면 갑옷 안에 배설물을 쏟는 경우가 많았다. 더군다나 땡볕 아래서 싸움을 하기도 했으니 땀까지 오죽이나 흘렸겠는가. 갑옷담당종자가 필요한 건 그 때문이었다. 그것을 아주 깨끗이 치워야 했던 것이다.

사형집행인 같은 경우는 공식화된 것이긴 하지만 사람을 죽인다는 이유 때문에 불량직업으로 뽑힐 만하다. 때에 따라서는 죽은 사람의 가족이나 친지에게 보복으로서 살해위협까지 받아야 했으니 먹고살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가 상상을 초월했던 것이다. 파이프 롤 필사원은 또 어떠한가. 지루한 직업의 으뜸으로 뽑힐 만한데 종일 받아쓰기를 한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 다음으로 스튜어트 왕조에는 서캐잡이, 검시원, 흑사병 매장인 등이 불량직업으로 뽑힌다. 흑사병이 창궐한 이 시대에는 흑사병 때문에 누구나 하기 싫어할 법한 직업들이 생겨났다. 그것은 무슨 일을 하는 직업일까?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역시 시체를 치우는 일일 게다. 그랬다. 그것과 관련된 직업들이 생겼는데 그것들은 하나같이 불량직업의 목록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조지 왕조 시대에는 기마경관이나 장루원, 로블롤리 모델, 미술가의 모델, 인간 조각상, 뮬정방기 청소부 등이 불량직업으로 뽑혔다. 미술가의 모델이 목록에 오른 것이 다소 뜻밖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모델과 그 대우가 전혀 다른 이 당시의 모델들은 당연히 불량직업으로 뽑힐 만했다. 당시의 모델은 지루하고 힘든 일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술가의 모델은 인간 조각상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인간 조각상이란 무엇인가. 문자 그대로 인간 조각상이 되는 직업이었다. 사람들과 말을 해서도 안 되고 돌아다녀서도 안됐다. 7년 동안 인간 조각상이 된다고 계약했다면 정말 7년 동안 조각상처럼 있어야만 했던 것이니 그 지루함과 고됨이 오죽이나 하겠는가? 하지만 인간 조각상은 안전을 보장받기라도 했다. 장루원이나 로블롤리 보이들은 영국 해군과 관련된 직업이었는데 일을 하다가 오늘 죽어도 그러려니 할 만한 직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니 참으로 불량직업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살펴보는 빅토리아 왕조는 돌 채집인, 굴뚝 청소부, 쥐잡이꾼, 여송연꽁초 수거인, 개똥 수거인, 하수관 수색꾼, 무두장이 등이 불량직업으로 뽑힌다. 이 직업들은 이름만 들어도 무슨 일을 하고 그 일이 얼마나 고된지를 상상할 수 있는데 눈여겨볼 것은 이 시대의 불량직업들이 산업혁명과 때를 같이해 맹활약했다는 것이다. 다른 시대의 불량직업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오늘날의 문명을 만드는데 없어서는 안 될 한몫을 단단히 해냈다는 말이다.

누구나 하기 싫어했지만 없어서는 안됐던 직업, 불량직업. <불량직업 잔혹사>는 그것들을 통해 역사 속에 이름 하나 남기지 못했지만 오늘의 시대를 만드는데 한 몸 바쳤던 이들을 기억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더불어 그 과정에서 그 시대를 엿볼 수 있는 기회까지 만들고 있다. 구토물 수거인이나 갑옷담당종자, 인간 조각상 등은 그 시대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낸 일종의 역사적 지표이기 때문이다.

불량직업이라 외면하지 마라. 영웅이 아니라 하여 버리지 마라. 그 시대의 불량직업을 묵묵히 수행한 이들 또한 영웅이라 불릴 자격이 있다. 그렇다. 이들이 없었다면 오늘도 없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도서정보 사이트 '리더스가이드(http://www.readersguide.co.kr)'에도 실렸습니다.


불량직업 잔혹사 - 문명을 만든 밑바닥 직업의 역사

토니 로빈슨.데이비드 윌콕 지음, 신두석 옮김, 한숲출판사(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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