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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

"왜 마음을 바꾼 것이오?"

의주를 빠져 나갈 때까지 아무런 말이 없던 차충량은 바위에 걸터앉아 계화가 정성스레 호박잎에 싸놓은 주먹밥을 먹으며 처음으로 장판수에게 말을 걸었다. 장판수는 입가에 살짝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전의 일은 미안하게 되었소."

내려 쪼이는 햇빛과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스산한 바람이 풀잎을 찬찬히 흔들어대었다.

"기런 거 신경 안 썼습네다."

장판수는 주먹밥을 싼 호박잎까지 달게 먹은 뒤에야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차 선달께서 목숨을 버려서라도 그 일을 하겠다고 하니 내래 만분지일이나마 힘을 보태기 위해서 따라 나선 겁네다. 심양의 일이야 이 일을 끝낸 후 나서도 늦지 않을 겁네다."

이번에는 차충량이 입가에 한 가득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내 장초관에게 미안허이...... 그 일은 내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한 바였소이다. 그런 일을 깨닫고 해 내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오? 아우에게는 차마 못 부탁하겠더이다."

차예량은 행여 목숨을 건 길을 떠나는 형이 염려할까 두려워 심양으로 간다는 말을 하지 않은 터였다. 이를 알고 있는 장판수는 말실수를 하지 않으려 조심하며 조심스러운 말로 차충량의 마음을 풀어주려 했다.

"지금 가는 이 길도 결코 쉬운 길은 아닙네다."
"...... 내 그래서 장초관에게 더욱 미안한 것이오. 내 한 목숨이야 스스로 져 버린다고 하지만 남의 목숨까지 위태롭게 하는 일이지 않소."

장판수는 어쩐지 떠날 때와는 달리 각오가 약해진 것만 같은 차충량의 말을 듣고 그가 마음을 돌리기를 바랐다.

'나와 함께 심양으로 가자는 청을 조리 있게 하려만 말머리를 어찌 꺼낼까.'

장판수가 잠간 궁리를 하고 있는 순간에 차충량은 옷을 털고 일어나 힘차게 말했다.

"자, 한시가 급하오. 청나라 사신보다 먼저 한양에 도착해 그들이 머물 남별궁 인근을 미리 둘러 본 다음 매복할 곳을 찾아야 하지 않겠소."

장판수는 속으로 차충량의 옹고집을 탓했다.

'분명 차충량은 마음속 깊이 불안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피해 갈수 있는 길을 굳이 가려고 한다.'

장판수는 청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었음에도 끝내 이를 피해 가지 못한 조선 조정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어쩌면 차충량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말을 꺼낼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래 듣기로는 선왕(광해군)때 장수에게 일부러 청에게 항복하라 일러 청나라가 조선 땅에 발을 들여 놓는 일을 방지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네다."

차충량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폐주(광해군)때의 일을 말함인가? 강홍립이라는 자였네. 불측한 일일뿐 선견지명을 가지고 한 일은 아니라고 알고 있네만."

장판수는 오래전 남한산성에서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강홍립을 따라 청에 항복한 바 있는 박난영은 청의 전술에 대해 초관들에게 일러주다가 이렇게 말한 바가 있었다.

'......차라리 강홍립을 보낸 선왕의 책략이 필요한 것을!'

그 박난영은 장판수에게 한 자루의 칼을 물려주고 청의 진지로 갔다가 마부대에게 무참히 살해되었다. 그 칼은 금화싸움 때 잃어 버렸지만 그 칼에 새겨진 한 글자는 장판수에게 잊혀 지지 않았다.

'散'

'흩어지다'란 뜻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왜 그런 글자를 칼에 새겨놓았는지는 모를 일이었고 장판수는 글자가 칼의 모양새만 망쳐 놓는다고 투덜거리기도 했다. 뒤에 생각해 보니 그 글자는 칼날에 산산히 흩어지는 피를 연상시키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그 피는 칼날에 해침을 당하는 누군가의 피가 아니라 바로 칼을 쥔 장판수 자기 자신의 피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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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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