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1 격투기 최홍만 선수가 일본의 한인촌을 방문하여 대전(對戰) 홍보를 할 때 대화를 나누던 재일교포들에게 나는 많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홍만 선수가 한국어로 말하는데도 그들은 일본어로 대답했던 것이다.
일본에서 살면서도 자나 깨나 고국을 생각하고 자라나는 재일교포의 미래를 생각하는 작가가 있다. 재일교포 작가 이은직씨다.
그는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일본대학 영문학부 예술학과를 졸업했으며, 대학생 시절에 소설 <물결>을 써내어 아쿠다가와(芥川)상 후보에 오른 적이 있다.
고국을 생각하고 자라나는 재일교포의 미래를 생각하는 작가
이은직씨는 3부작 장편소설 <탁류>와 <신편 춘향전> 등의 소설을 써냈는데, 특히 그는 우리나라 역사를 빛낸 자랑스런 위인들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조선명인전>을 써냈다.
내가 읽은 것은 1994년에 나온 초판이 아니라 개정판 번역서(2005년 8월 12일 일빛 펴냄)이며, 전 3권을 더하면 1318쪽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이다. 삼국시대에서 고려, 조선까지 모두 90여 인이 다루어져 있다. 함께 다루어진 사람까지 헤아리면 수백 명이다.
다시 말하면 삼국시대부터 조선까지의 우리 역사를 뛰어난 인물 따라 거의 훑어놓은 셈이다. "('재미'와 '유익함'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고 있어서) 향후 10년 내로 한국 인물사를 다룬 이만한 저작은 쉽게 나오기 힘들다"는 옮긴이(정홍준)의 말처럼, 이 책은 참으로 기념비적인 책이다.
왕을 꾸짖은 대제학
나는 대화하기 편안한 자리에 앉으면 이따금 이런 연기를 성우처럼 할 때가 있다.
"상감마마, 수신(修身)하시어 평천(平天)하시옵소서!"
이것은 서포 김만중이 숙종에게 한 말이다. 나는 뛰어난 한글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써낸 서포 김만중을 매우 존경하고 있는데, <조선명인전>에서는 그를 어떻게 다루었을까 궁금하였다. 그가 귀양 가기 전의 대목이다.
..이번에는 곧바로 복직되어 대제학(大提學)이라는 학문에 관한 최고 책임자가 되었지만, 그의 주변에는 다시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 조짐은 김만중의 조카인 왕후가 1680년 스무 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면서 비롯되었다. (중략)
숙종은 1681년 민씨를 다음 왕비로 맞아들였는데, 민씨에게 자식이 없자 1686년 명문 출신이 아닌 장씨를 숙원(淑媛)이라는 지위를 주어 첩으로 삼았다. 이 일이 귀족주의적인 양반들 사이에 논쟁의 씨앗이 되었다.
1687년 당시 재상의 아들 김창협(金昌協)이 장씨를 비난하는 상소문을 제출하자, 왕은 그의 논리가 매우 경박하고 불손하다며 김창협을 처벌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인 김수항(金壽恒)을 영의정의 지위에서 끌어내렸다.
김만중은 궁전에서 강의할 때 왕의 이러한 감정적인 태도에 대해 직언하였다.
'아들의 언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공신을 파면하는 것은 왕자(王者)로서 취할 바가 아닙니다."
이 말에 크게 화가 난 왕은 중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를 평안도 북쪽의 선천(宣川)으로 귀양을 보내버렸다. 늙은 어머니는 유배지로 떠나는 자식을 위로하면서 이렇게 당부하였다.
"옛날부터 청렴한 사람일수록 자주 귀양가는 것이다. 부디 건강을 조심하고 이 어미 걱정일랑 하지 말아라."
-<조선명인전> 2권 241~242쪽에서
아무리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이 책의 3권 말미에는 이 책에서 다룬 인물들을 간략히 소개해 놓은 인명사전이 부록으로 붙어 있다. 앞서 본문의 각 장 제목은 그 인물의 특징을 수식해 놓아 이해를 돕고 있다. 가령 이런 식이다.
'사대주의와 민족주의의 두 얼굴, 김부식', '무인 정권 시절 지식인의 초상 이규보', '한국 불교의 두 기둥, 의천과 일연', '조국에 일생을 바친 위대한 문호 이제현', '민중을 사랑한 두 사람, 최무선과 문익점', '반골 학자 김시습', '재야의 철학자 서경덕', '뛰어난 여성의 표본 신사임당',
'주자학의 권위자 이황', '위대한 인간성의 사상가 이이', '뜨거운 가슴의 시인 정철', '민족 의학의 대가 허준', '풍류와 기백의 문인 임제', '대표적 여류시인 황진이와 허난설헌', '풍운아 허균과 <홍길동전>', '시조의 대가 윤선도', '풍속화의 양대 거장 김홍도와 신윤복',
'실학의 우뚝한 봉우리 정약용', '혁명아 홍경래와 그의 투쟁', 방랑 시인 김삿갓, '판소리 중흥의 공로자 신재효', '천재 화가 장승업', '개화 운동의 지도자 김옥균', '갑오 농민 전쟁의 지도자 전봉준', '용맹한 의병대장 홍범도', 근대 국어학 연구의 선구자 주시경'…
저자는 아무리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 인물들도 슬픔과 기쁨과 고통 속에서 산 사람들이므로 인간적인 모습을 되도록 생생하게 묘사하려고 애썼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런 작가의 정신이 행간에 황토처럼 냄새 짙게 깔려 있다.
자녀의 인성을 기르고 배움의 자세를 돕기 위하여
이 책은 저자가 일본에서 나고 자란 젊은이들에게 애국심을 불어넣어 주고 자신감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 쓴 것이다. 모국어로 번역된 개정판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청소년 권장도서로 선정되었다. 어른들이 보기에도 아주 적절한 책이다.
마침 독자의 가문에 이 책에 수록된 인물이 있다면, 자녀들에게 그 소중한 사실을 알려주고 공부를 격려하면 자신의 선조를 본받아 인성(人性)은 물론 배움의 자세가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