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한국 주빈국 행사가 준비기간 부족, 전시목록 100권 선정의 적정성, 엉성한 번역 등 준비 기간부터 숱한 문제제기 속에서도 성공적으로 이뤄졌다는 국내외의 평을 받으며 23일(현지시간. 한국시간으로 24일) 마감됐다.
<프랑크푸르트 룬트샤우>는 한국주빈국관 홍보역할을 대행했던 슈테판 슈톨씨의 말을 빌어 "총 관람객수 2만5천명으로 역대 주빈국 행사를 통틀어 30%내에 드는 것"이라고 호평했다.
75개의 출판사가 대거 참여한 한국출판계 또한 이번 도서전을 통해 적지 않은 수확을 거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행사장에서 만난 한국 출판협 관계자는 "작년에 비해 다섯 배 가량 많은 저작권 계약이 이뤄졌으며 아동, 건축, 문화 관련 도서 등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밝혔다.
반면 <벨리너 차이퉁> 24일자는 "무난하게 끝났지만 이전에 비해 책과 관련된 스캔들, 베스트셀러 등도 없었고 작년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그렇게 눈에 띄게 거래가 활발해 진 것은 아니어서 크게 돋보인 도서전은 아니었다"고 평했다. 특히 한국 주빈국 행사와 관련, 작년 아랍관의 경우 주빈국 행사 보다 아랍이 차지하고 있는 국제정치의 측면에서 도서전 분위기에 영향을 많이 미친 반면 한국 행사는 도서전 전체의 분위기를 휩쓸거나 토론, 대화거리를 선점하는 수준은 아니었다고.
주빈국 행사, 유비쿼터스북과 금속활자가 살렸다
이번 주빈국 행사의 꽃은 유비쿼터스북과 직지(직지심체요철)이었다. 한국의 유구한 역사를 상징하는 선사시대의 고인돌 앞에 책 한권과 함께 놓여 있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관람객들은 유비쿼터스 북에 대한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얼굴 표정이 금방 신기함과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평가되고 있는 직지를 비롯한 한글의 출판 역사가 전시되어 있는 코너에서는 직접 금속활자를 만져보고 한글의 창제원리를 열심히 들으며 한국 문화에 '입문'하고 있었다.
금속활자, 종이를 제작하는 현장을 소개하는 야외 전시장에서는 600년 전 금속활자 제조과정을 구경하던 관람객이 신기한 듯 눈을 떼지 못했고, 목판 인쇄 과정을 지켜보던 한 외국인은 한지에 찍힌 내용이 뭐냐고 물으며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였다.
한지 행사를 준비했던 한지제작 업체 대표 유강열씨는 "이번에 처음으로 참여했는데 반응이 매우 좋았다, 내년부터는 이번 경험을 바탕으로 더 체계적으로 준비해 도서전에 참여하려고 한다"며 문화상품으로서 전통 한지의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다.
한국 주빈국 행사 총감독을 맡았던 황지우 총감독은 "세계가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는 첫 계기를 마련하는데 성공했지만 한국문학이 세계무대에서 성공적으로 뿌리내리려면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며 "특히 번역작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대우가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외국의 문학전문가가 한국 문학에 관심을 갖고 현지인에게 관심을 가질 만한 작품을 직접 번역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지원책이 필요하다는 것.
출판협 관계자 또한 "이번 도서전에서 우리 작가들에 대한 반응이 아주 좋았지만 이것이 한국 문학에 대한 실제 수요로 이어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이번 성과가 구체적 열매를 거두기 위해 지속적 투자가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한편 일본 NHK 기오미씨는 "일본의 경우 메이지유신 이후 미국, 독일, 영국 등 전 세계로부터 엄청난 양의 책이 들어왔는데 당시에는 제대로 된 번역가가 없어서 번역을 하는 사람이 높게 평가되었고 지금도 그런 전통이 남아 있다"며 "일본 책이 독어로 번역되는 것은 주로 독일인 일본학과 교수들이 관심을 갖고 일본책을 많이 번역한다"고 말했다. 현재 독일에는 20여 개의 일본학과가 있는 반면 한국학과는 2~3개에 불과하다.
황지우 감독을 만나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한국 주빈국 행사에 대한 평가를 들어봤다.
"한국문학의 문학적 해빙, 그게 성과다"
- 한국 주빈국 행사 총감독을 맡았었는데 도서전을 짧게 평한다면?
"한국, 독일 주최 측 모두 주빈국 행사가 아주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 책의 새로운 존재 형태를 실험적으로 보여준 유비쿼터스 북, 아고라 광장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의 목판, 금속활자 등은 대단하다는 호평을 받았다. 전체적으로 우리의 문화적 역량과 깊이를 세계에 보여준 기회였다."
- 행사를 준비하면서 한국 문학이 유럽을 비롯한 세계에서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경험했을 것 같다.
"아시아 하면 중국과 일본을 연상하는 게 일반적이다. 한국은 두 문화의 그림자에 끼어 유럽에서는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는 어정쩡한 존재로 각인되어 있다. 특히 한국 문학은 완전히 꽁꽁 얼어있는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이번 행사를 준비하면서 꽁꽁 얼어있던 동결상태에서 결빙현상이 나타나는 문학적 해빙 현상이 나타나길 기대했다."
- 문학적 해빙현상을 위해 구체적으로 진행된 게 있는가?
"우리의 문학이 국제무대에서는 생소해 아직은 관심을 끌기 어렵다. 그래서 지난 3월부터 독일 전역을 돌며 문학을 소개하는 행사를 가졌다. 예열작업을 한 것이다. 우리나라 영화에 대한 반응이 좋기 때문에 이것과 묶어서 진행했다. 또한 독일의 문학전문기자, 작가 등 문학전문가 등이 자리를 함께해 우리 문학을 소개하고 대화하는 것을 시도했다. 그런 전략이 유효했던 것 같다. 이러한 문학전문기자, 작가 등이 우리 문학의 매력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는 것이 큰 수확이다."
- 특히 이번 행사에서 '관객과의 대화'를 강조했는데.
"내용적으로 우리의 직지를 중앙에 배치해 찾아오는 관객과 첫 대화를 시도했고 전체 행사에서 대화와 소통이 중요한 콘셉트로 자리 잡게 했다. 우선 주빈국관을 찾은 사람들이 시각적으로 감동을 받을 수 있도록 시도했으며 한 겹 한 겹 벽을 통해 더 깊이 있는 단계로 다가설 수 있도록 대화를 강조한 것이다. 이를 두고 독일의 한 기자는 캐면 캘수록 새로운 것이 계속 나온다고 했고, 한 여류문학 기자는 오정희씨의 작품을 접하면서 감전된 듯한 전율을 느꼈다고 했다. 의사소통이 이뤄진 것이다."
"90년 일본 주빈국 행사보다는 잘했다"
- 주빈국 행사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많다.
"개인적으로 90년 일본의 주빈국 행사를 능가하는 것이 목표였다. 일본은 수년에 걸쳐 주빈국 행사를 준비했고 이미 1만5천여 권의 문학 작품이 번역되어 있는 등 좋은 여건에서 준비를 진행했다. 하지만 우리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시각 효과와 창의성 극대화 전략을 취했다. 독일 측 조직위로부터 주빈국 행사가 일본보다 좋았다는 평가를 들었다.
또 일본은 모든 것을 자국에서 준비해 일방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을 취했지만 우리는 대화를 시도했고, 도서전 조직위와 시작단계부터 모든 분야에서 함께 일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런 방식 자체가 우리에겐 아주 의미 있는 과정이었다."
| | | 도서전에서 만난 소설가 한강 | | | | 22일 주빈국관에 마련된 무대에서 작가와의 만남 행사를 마치고 내려온 소설 <내 여자의 열매>의 작가 한강씨와 짧은 대화를 나눴다.
- 도서전에서 '세계 독자와의 만남' 시간을 가졌는데 소감이 어떤가.
"작가의 작품을 직접 읽고 대화하는 낭독회라는 스타일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한국에서는 시낭송회를 제외하고는 다른 문학 작품 관련해서는 이런 방식의 행사를 찾아보기 힘든 데 이곳 문학계에서는 하나의 문화로 정착된 방식인 것 같다."
- 한국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행사가 독일 전역에서 열렸는데 어땠나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독자들과 소통한다는 것이 참 좋았다. 진지하게 집중해서 듣는 모습, 한국어라는 생소하게 들리는 외국어를 열심히 경청하는 모습을 보면서 좋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나라에도 사인회라는 공간이 있지만 독자와 저자가 목소리를 통해서 교류를 한다는 것이 참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작가로서 경험한 도서전은 어땠는지?
"일정에 쫓겨 차분하게 도서전을 돌아볼 시간을 거의 갖지 못했지만 전체적으로 문화관련 행사가 많아서 좋았다. 한국에서 접하기 힘들었던 공예, 미술 작품들을 직접 접할 수 있었다는 점도 내겐 행운이다."
- 이번 행사를 통해 한국문학이 세계에 알려질 수 있을까.
"정말 제대로 된 좋은 번역이 나와야 한다. 이번 행사를 치르면서 제대로 번역된 책이 별로 없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 | | | |
- 번역에 대한 문제제기도 많았는데.
"맞다. 번역 문제가 시급하다. 번역자에 대한 사회적 대우가 달라져야 한다. 번역은 제 2의 창조다. 인식의 변화가 시급하다. 외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번역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잘된 번역은 논문으로도 인정된다. 이러한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고는 제대로 된 양질의 번역이 나오기 힘들다.
특히 외국의 문학전문가가 한국문학에 관심을 갖고 직접 연구하고 번역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그들 스스로 그들이 흡수할 만한 작품을 직접 번역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본의 경우 관련재단이 있어 외국인 번역자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 외국인 가운데 한국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 전문가가 한국에 2~3년가량 거주하면서 한국을 경험할 수 있도록 번역동기를 제공해야 한다."
- 도서전 이후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이번 행사를 통해 전체적으로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첫 단계는 일단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다음 단계의 작업이 아주 중요한데 현실적으로 내년에도 이런 규모의 행사를 진행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여하튼 지금의 열기가 지속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 다시 식어버린다. 정부, 출판계, 대기업 등 여러 단체들이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말라버린 녹슨 펌프에 물 한바가지를 부어 이번에 겨우 물을 다시 길어 냈다. 계속 펌프질을 해야 한다."
| | 아시아는 구매자, 유럽은 판매자? | | |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의 불균형 매커니즘 | | | |
| | ▲ 주빈국관에서 내려다본 아고라광장, 하얀 천막들이 주빈국행사가 열리고 있는 장소 . | ⓒ강구섭 | 매년 10만 여종의 각국 신간을 비롯해 35만점의 도서가 전시, 소개되고 3천여 회의 부대 행사가 열리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역시 행사에 참여한 각 나라 출판계가 각국의 도서, 출판물 등의 저작권을 사고파는 것이다.
이에 따라 첫 4일간의 행사는 관련업계 종사자, 각국 기자 등에게만 개방되며 이런 전문참가자가 전체 참가자의 70%를 차지한다. 이와 함께 매년 한 나라를 초청국가로 선정해 그 나라의 문화, 예술을 보여주는 주빈국 행사를 비롯한 각종 이벤트가 열려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1976년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22개국이 주빈국으로 참여했으며 2006년에는 도서전 사상 처음으로 이미 1986년에 주빈국으로 선정된 바 있는 인도가 두 번째로 주빈국으로 참여한다.
책이라는 종이매체가 도서전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지만 2004년의 경우 전시된 것에서 종이 도서가 차지한 비율은 42%에 불과했으며, 전자도서, 소프트웨어, 멀티미디어자료 등의 전자출판물이 점차 자리를 넓혀가고 있는 추세다.
도서전에서는 전 세계 출판계 종사자들간 정보 교환, 교류를 지원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개최되며 1500명의 통, 번역자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또 출판계 이외에 독일의 영화, 언론계 등도 참여해 책을 매개로 한 다양한 행사가 열리며 영화가 상영되기도 한다. 특히 올해 도서전에는 2006년 독일월드컵 홍보 코너가 더해져 300여 평 축구관련 전시공간에 작은 축구장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매년 80~100여 개국의 6500~7000여 도서 및 출판 관련 업체가 참여하는 도서전은 그 자체로 거대한 기업 성격을 띠고 있다. 주최 측에 따르면 2004년 도서전을 통해 거둔 매출은 6억 유로(7800억)에 달하며, 행사 전후로 프랑크푸르트를 비롯한 인근지역에 10억 유로(1조3천억)가 유입됐다.
한편 독일관에서 만난 몇몇 독일출판계 관계자는 도서전이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아시아의 출판계는 다수의 저작권을 구매하는 수요자로, 미국, 유럽 등의 출판계는 판매자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의 출판계가 매년 다수의 저작권을 구매하는 반면, 유럽의 출판계가 아시아의 학술, 문학 등에 관심을 보이는 비율은 매우 저조하다는 것이다. 책을 매개로 한 교류, 소통의 장이라는 모토를 내걸고 있지만 교류의 내용에 있어서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심각한 불균형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강구섭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