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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으로 살짝만 비벼도 바스라질 것처럼 누렇게 벼가 익은 논에 콤바인 한 대가 들어서고 논 주인은 기계가 들어갈 수 있도록 논 가장자리의 벼들만 베어 놓고 논둑에서 기다리는 것이 요즘 농촌 풍경이다. 21세기의 농촌에서는 사람보다 기계가 농사를 더 잘 짓는다. 하지만 농기계들은 거친 흙 속에서 험하게 하는 일이 많아서 고장을 잘 일으키기 일쑤다.
충남 부여군 충화면에는 어디에서든지 언제든지 농기계가 탈이 났다고 부르면 달려가는 집배원이 있다.
22일, 지난 밤 내린 비로 질척한 논바닥을 고속도로처럼 잘도 달리던 콤바인이 갑자기 멈춰버리자 운전을 하던 유영찬씨가 내려서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휴대 전화를 꺼낸다.
"여보세요? 김형, 콤바인이 바심(벼베기)하다가 멈췄는데 와서 한번 좀 봐 줬으면 좋겄어."
잠시 후, 우체국 집배원 김영완씨가 오토바이를 타고 급하게 달려오더니 집배원 적재함에서 연장을 꺼내들고 유영찬씨의 논으로 성큼 들어선다. 김영완씨의 숙련된 손길이 닿자 고집 센 야생마 같던 콤바인이 어느새 얌전하게 길들여져 탈탈탈 잘 돌아간다.
만능 기술자로 통하는 부여군 임천 우체국 집배원 김영완(38)씨. 그의 손재주는 바쁜 농사철엔 고장난 농기계를 수리하는 일로 더 돋보인다.
"집배원 일을 하다 보면 농기계가 고장 나 바쁜 농사철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모습을 볼 때가 많지유. 그럴 때 내 할일이 바쁘다고 그냥 지나 갈 수가 있남유. 퇴근을 하고 와서라도 봐 줘야지유."
요즘은 농사일도 속도전이라 기계가 고장이 나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정도로 바쁘지만 기계가 고장 나면 부여읍에서 기술자를 부르거나 읍내까지 기계를 가져가서 고쳐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 하지만 충화면에서는 우편물을 배달하면서 동네 사정에 훤한 김영완씨가 농기계 수리는 물론 가전제품까지 손을 봐줘 지역 주민들의 근심을 덜어주고 있다.
"집배원이 아니라 맥가이버래유, 우리 집의 고장난 밥통까지 다 고쳐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유~."
농고 출신으로 한때 직접 농사를 짓기도 했던 김영완씨. 그는 농사일의 고단함과 농촌 인구의 고령화로 일손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우편물을 배달하는 본업에만 충실하며 주민들의 어려움을 외면할 수 없다고 한다. 그는 논 가운데 혹은 밭에서 갑자기 멈춰 농부의 애를 태우던 농기계를 고쳐 제대로 작동될 땐 자신의 몸에 시동이 걸리는 것처럼 뿌듯하다고 한다.
김영완씨의 오토바이 우편물 적재함에는 우편물과 공구 외에 또 한 가지가 들어 있다. 그 것은 '부여 관광 안내장'이다. 드라마 '서동요' 세트장이 충화면에 세워지면서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제법 많아지고 있어서라고.
집배원인 그에게 길을 물어보는 관광객이 많은 것에 착안을 한 김영완씨는 '부여군 관광 안내장'도 함께 가지고 다니게 되었다. 외지 관광객들에게 길안내를 친절하게 해주는 것은 물론 부여 관광 안내장까지 건네는 일은 그의 일과가 되어버렸다.
그는 시간이 날 때면 가화리 드라마 <서동요> 세트장 입구에서 부여 관광 안내장을 관람객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안내 도우미 역할을 자처하기도 한다. 시골 우체국 집배원으로서 농심을 잊지 않고 함께 사는 일이 당연하다는 김영완씨는 오늘도 시골길을 힘차게 달리며 고장나 멈춰 서 버린 농기계가 없는지, 길을 물어 보는 관광객은 없는지 살펴보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점점 인구가 줄어드는 시골 생활이지만 이런 사람들이 있어서 그래도 살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