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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한가운데로 걸어들어가다
가을의 한가운데로 걸어들어가다 ⓒ 김비아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대가 더욱 그립다고 했던가. 가을이 바로 곁에 다가왔는데도 가을이 한층 더 그리워졌다. 이 가을을 온통 품에 안고 싶어서, 가을의 심장부로 뛰어들고 싶어서 산을 찾았다.

내 생애 최고의 가을, 그 가을이 지리산 속에 있었다. 태풍이 없어서인지 올 단풍은 유난히 고운 빛깔을 뽐냈다. 산에서 보낸 사흘 동안, 원없이 걸었고, 가을의 정수를 오롯이 들이키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한낮의 햇살이 환하게 내리쬘 무렵 뱀사골 계곡의 입구, 반선에 도착했다. 지난 여름 폭우가 쏟아졌을 때 이후 두 달만의 지리산행이다. 계곡길에 들어서자마자 원시림이 주는 광대한 기운이 나를 감동시킨다. 숲은 까마득하게 오래된 느낌을 주는 동시에 막 새 옷으로 갈아입은 듯 해맑은 표정으로 내게 인사를 해왔다.

뱀사골 계곡
뱀사골 계곡 ⓒ 김비아
이 숲뿐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그러하다. 우리 모두는 오래된 존재인 동시에 매순간 새롭게 깨어나는 존재이니까. 산 정상에서 시작된 단풍은 이제 산 아래로까지 번지고 있었고, 그래서 걸을수록 점점 더 깊어가는 가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뱀사골엔 노란 단풍이 많았다. 노란 빛깔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붉은 빛과 소나무의 초록빛이 서로 어우러져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없을 법한 장관을 연출한다. 그뿐인가. 숲 사이로 흐르는 물도 산을 품어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것을. 입 밖으로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산도 붉고, 물도 붉고, 내 마음도 붉네….'

봄산도 참 예쁘지만 가을산에는 특별한 감동이 있다. 그건 아마도 가을이 주는 깊은 맛 때문일 것이다. 산 속으로 향하는 이 길이 가을의 한가운데로 다가서는 길이자 내 영혼의 중심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길처럼 느껴지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세월의 흔적이 이 가을과 같은 표정으로 내 얼굴에 새겨질 수만 있다면, 나이 들어가는 것을 조금쯤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가을처럼 깊어가는 것. 깊어지고 깊어진 끝에 마침내는 흔들리지 않는 침묵에 도달하는 것이리라.

뱀사골 병소
뱀사골 병소 ⓒ 김비아
반짝이는 소를 여럿 지나 제승대에 접어들었다. 제승대의 빼어난 경관은 과연 가을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길을 멈추고 넋을 잃고 주위를 바라다보았다. 그리고 길을 걷는 동안 내내 귓가에 맴돌던 친구의 물음에 답을 내린다.

며칠 전 친구는 이렇게 물었다. 아무래도 신이 지구를 포기한 것 같다고. 그게 아니라면 지구에 관심이 없는 모양이라고. 제승대의 가을 향기는 그럴 리가 없다는 확신을 내게 심어주기 시작했다. 신이 제 정신이라면 절대 지구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숲은 내게 말해주었다.

신은 이처럼 공들여 가꾼 아름다움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까마득한 세월의 손길 끝에 지구는 이렇듯 아름다운 별로 빚어졌다. 영원과도 같은 긴 세월을 거쳐 지금 이 순간을 맞이했는데, 그가 더 기다리지 못할 까닭이 무엇인가. 신은 이 자리에서 천 년도 더 기다릴 것이다.

제승대에서
제승대에서 ⓒ 김비아

제승대에서
제승대에서 ⓒ 김비아
만약 그가 정말로 지구와 인간을 포기한 거라면 태양은 지금이라도 당장 빛을 잃고 말리라. 가을은 이처럼 눈부시게 빛나지 못할 테고, 물은 또한 저처럼 맑고 깊게 흐르지 못하리라. 이 모두가 신의 현현이다. 자연은 쉼 없이 흐른다. 절망은 인간 한계의 표현이지 신의 것이 아니다.

또한 이 흐르는 자연은 그냥 무심히 흘러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땅에 떨어진 낙엽 하나도 그냥 떨어지는 법이 없다. 대지는 자신이 낳은 자식을 기억한다. 지상의 모든 존재를 연결해주는 끈은 사랑, 북미 인디언 시애틀 추장이 말했듯이 우리가 이 땅에 대한 애정을 간직하고 있는 한 이 땅과 우리는 하나다. 우리가 사랑과 존경으로 대지를 돌보는 한 대지는 언제까지나 우리를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남아 있는 사랑이 없다면 우리 존재는 먼지처럼 잊혀지고 말 것이다.

대지는 이 모든 시간을 기억하리라
대지는 이 모든 시간을 기억하리라 ⓒ 김비아
네 시간의 산행 끝에 뱀사골 대피소에 도착했다. 예약해둔 연하천 대피소까지는 두 시간을 더 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거기 닿기 전에 해가 질 것 같았다. 마침 뱀사골 대피소에 자리가 있어서 예서 묵어가기로 작정한다.

그 바람에 시간에 여유가 생겨 가까운 삼도봉을 보러 가기로 하고 대피소에 짐을 내려놓고 다시 길을 나섰다. 좀 고단했던가 보다.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는 핑계를 대며 나는 몇 걸음 못 가 화개재에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얼마 후 구름 사이로 햇살이 아름답게 비치는 모습을 보니 삼도봉까지 가지 않은 것이 자못 후회가 되었다. 거기서라면 동서남북 탁 트인 경치를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화개재에서
화개재에서 ⓒ 김비아

화개재에서 바라본 해넘이
화개재에서 바라본 해넘이 ⓒ 김비아
그러나 곧 아쉬움을 털어버리고 화개재의 해넘이를 지켜보았다. 순간순간 변화하는 빛이 늘 그래왔듯 내게 또 한 차례 황홀한 기쁨을 선사했다. 자연은 매순간 다르게 진동한다. 해질녘이나 해뜰 무렵, 안개 자욱한 아침이나 비 그친 직후엔 자연의 진동이 더욱 또렷하게 감지된다. 그 리듬에 몸을 맡길 때면 언제나 행복하다.

어느덧 해는 완전히 넘어가고 산은 짙은 어둠 속에 잠겼다. 주위가 칠흑처럼 깜깜해왔다. 도시에는 진정한 의미의 밤이 없다. 하여 산 속에 찾아드는 밤, 이같은 깊은 정적 속에 몸을 담글 때면 내 마음도 한없이 깊고 고요해진다.

 

덧붙이는 글 | 10월 20~22일에 지리산을 걸었습니다. 세 번에 나누어 실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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