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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뒤를 이어 봉사하는 홍예림 양
엄마의 뒤를 이어 봉사하는 홍예림 양 ⓒ 김범태
그녀는 독거노인과 지체부자유자, 산동네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전해오다 과로와 지병이 겹치면서 지난달 세상과 작별해 주변을 안타깝게 했던 고 전영숙 씨의 딸 예림(20. 삼육대 신학과)양이다.

예림양은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매주 토요일 아침이면 이렇게 어김없이 앞치마를 두른다. 오전 9시부터 시작되는 일과 동안 그녀는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주방보조, 설거지, 청소 등 궂은일을 도맡아 한다.

이날의 메뉴는 정성스레 준비한 콩나물무침과 아욱된장국, 고추볶음, 계란말이 등. 대부분 나이가 많은 노인들인지라 자극적인 음식은 피하고, 채식 위주의 건강식으로 메뉴를 짰다. 음식을 준비하는 예림양의 솜씨가 엄마를 따라 잡으려면 아직도 한참 멀어 보이지만, 열성만큼은 한눈에 보아도 생전의 엄마 못잖다.

곧 봉사센터를 찾는 노인들의 발자국 소리가 하나둘씩 늘어났다. 예림양은 친구들과 함께 잠시 일손을 놓았다. 식사가 나올 때까지 무료해 하며 기다릴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위해 간단한 스트레칭과 건강체조를 하기 위해서다. 손녀뻘 되는 '선생님'의 상냥한 가르침에 노인들의 표정에서 오랜만에 건강한 행복이 묻어난다.

12시부터 배식이 시작됐다. 늦게 도착한 노인들을 자리로 안내하고, 식판을 나르고, 식탁을 닦아내느라 예림양은 정신이 없다. 설거지까지 마친 시간은 이미 식사 때가 훨씬 지난 이후였다. 매월 첫째 주말에는 무료진료와 미용봉사가 있는 날이라 오후 5시가 지나서야 겨우 마무리된다고.

예림양은 자신의 작은 손길이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이렇듯 큰 힘이 된다는 생각에 고된 것도 잊은 표정이다. 그녀는 "음식이야 보잘 것 없지만, 어르신들이 그 속에 담긴 사랑을 느끼고 건강하셨으면 좋겠다"면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미소만 보아도 피로가 싹 가신다"고 환히 웃어 보인다.

친구들과 함께 밝은 표정으로 봉사하는 예림 양
친구들과 함께 밝은 표정으로 봉사하는 예림 양 ⓒ 김범태
예림양이 이곳에서 봉사를 시작한 것은 지난해부터. 엄마의 와병으로 아버지 홍순명 교수(삼육의명대 건축설계과)를 따라 나선 것이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는 낯설기도 하고, 손에 익지 않은 서툰 솜씨가 불편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점차 익숙해졌다.

요즘은 엄마의 빈 자리를 아빠가 대신 메우고 있다. 홍 교수는 매주 금요일 오후면 인근 농수산물시장에 들러 직접 반찬거리를 구입한다. 메뉴는 전 주에 무슨 요리를 할 것인지 봉사자들끼리 의논을 해 놓은 상태기 때문에 필요한 것만 장만하면 된다.

엄마의 손때가 아직도 선명하게 묻어 있는 곳에서 봉사하려다보니 문득문득 엄마의 향기가 그리워지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예림양은 "엄마가 사신 것만큼 열심히 살겠다"던 약속을 곱씹으며 애써 눈물을 삭힌다.

"사람인데 어떻게 엄마가 일하던 곳에서 그분 생각이 나지 않겠어요? 하지만 엄마의 손길이 닿았던 곳곳에서 '아, 엄마가 이런 일을 하셨구나...'하고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그분과의 약속을 되새겨요."

엄마의 뒤를 이어 이런 봉사활동을 한다는 것이 예림양에겐 더 큰 보람인 셈이다. 그런 예림양의 모습에 주위 사람들의 칭찬이 그치지 않는다. 임금순 월곡적십자회장은 "문득문득 엄마의 뒷모습을 보는 것 같아 한편으론 코끝이 찡하게 달아오르기도 하지만, 기특하고 고마운 마음"이라며 "부모님처럼 봉사하며 사는 훌륭한 젊은이가 되길 바란다"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자신 역시 바쁜 일상이지만 후배의 봉사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아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싶어 참여하고 있다는 장명숙씨는 "힘든 일도 있겠지만, 부모님의 뒤를 이어 당차고 야무지게 잘 해낼 것을 믿는다"며 "앞으로도 계속 봉사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미소를 건넨다.

노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예림 양
노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예림 양 ⓒ 김범태
노인들도 예림양이 전씨의 딸인 것을 알아보고는 "엄마만큼만 착하게 살라"며 머리를 쓰다듬는다. 조수남 할머니는 "어려운 형편의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모습이 마치 천사같다"며 "우리 같은 사람이야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감사한 일"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딸의 모습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아버지 홍순명 교수는 "억지가 아닌, 자발적으로 봉사하는 모습이 기특하다"며 "앞으로 자신의 인생에 큰 유익이 될 것"이라고 흐뭇해했다. 홍 교수는 "어려서부터 '가치 있는 일에 인생의 승부를 걸라'고 가르쳤는데, 앞으로 부모를 능가하는 봉사자가 되리라 기대한다"며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봉사의 길을 걷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는 이곳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800여 세대가 살았지만, 재개발의 바람을 타고 많은 이들이 떠나 지금은 200여 세대가 살고 있다. 그나마 올 겨울이 지나면 모두 이곳을 떠나야 하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는 딱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60여 가구나 된다. 때문에 이들에게 잠시나마 이웃의 사랑을 채울 수 있는 매주 토요일은 매우 소중한 시간이다.

예림양은 "이곳이 앞으로 더욱 체계적으로 운영되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희망한다.

비좁은 비탈길을 내려오는 사이, "엄마가 보여주신 삶처럼 이웃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면서 살아가겠다"던 그녀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귓가에 울렸다. 이젠 다시 볼 수 없지만, 언제나 마음 속에 모시고 있는 엄마에게 전하는 그녀의 마지막 약속이기도 하다.

부인 조의금 모아 불우이웃돕기 성금 쾌척 홍순명 교수
“고인 뜻처럼 더 깊은 믿음과 사랑 나누는 행복한 가정되길...”

▲ 부인의 조의금을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쾌척하는 홍 교수
고 전영숙 씨의 남편인 홍순명 교수(삼육의명대 건축설계과)가 이번에는 부인의 조의금 1천만원을 자신이 봉사하고 있는 월곡동, 장위동 인근의 생활형편이 어려운 소외계층 주민들을 위한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쾌척해 또 다른 감동을 전하고 있다.

홍 교수는 지난 15일 "월곡동을 사랑하여 이곳에 몸을 바친 고인의 뜻을 모아 부의금 중 일부를 생활비로 지원하오니 더 깊은 믿음과 사랑을 나누는 행복한 가정들이 되길 바란다"며 담아두었던 마음을 나누었다.

홍 교수는 이날 "월곡동은 이제 우리 가족들에게 잊을 수 없는 곳이 되었다"며 "평생 여러분 곁에서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고 싶다"고 고백했다. 또 "우리의 사랑을 나누는 것이 서로에게 의미 있는 일이 될 것 같다"며 "혹, 재개발되더라도 계속 만나자"고 말했다.

홍 교수의 이러한 선행에 조섬용 동장은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이렇게 좋은 일을 하시는 분들이 많다"고 감사하며 "수혜자 여러분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드는데 모두 함께 힘을 보탰으면 좋겠다"고 인사했다.

월곡동 주민들은 "부인을 잃은 큰 슬픔에 아직도 경황이 없을 텐데, 이렇게 선뜻 사랑의 손길을 전해주시니 감사하기 그지없다"면서 "우리의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다 표현하겠느냐"고 눈물을 훔쳤다.

홍순명 교수는 지난 2001년부터 제자들과 함께 이곳 성북구 하월곡동 인근 달동네에서 화재와 붕괴 등 생존의 위협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가난한 이웃들의 낙후된 주거환경을 개선해 주고, 무료급식, 무료진료, 이.미용 봉사 등 정성을 다한 봉사를 펼쳐왔다.

그는 학생들에게 건축적 기술봉사는 물론 우리와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사회적 지원 없이 소외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봉사를 통해 인생의 깊이를 배울 수 있도록 이끌었으며, 도시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삶의 새로운 희망을 주고자 노력해 왔다. / 김범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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