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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월요일 오후 다섯시가 되면 그들은 공연준비를 서두른다. 소외된 노동자 자녀들의 교육을 돕기 위한 <들불장학재단> 설립 때문이다. 사진 아래 왼쪽, 기타줄을 고르고 있는 노동자 가수 연영석씨.
매주 월요일 오후 다섯시가 되면 그들은 공연준비를 서두른다. 소외된 노동자 자녀들의 교육을 돕기 위한 <들불장학재단> 설립 때문이다. 사진 아래 왼쪽, 기타줄을 고르고 있는 노동자 가수 연영석씨. ⓒ 이동환
성당 계단을 타박타박 내려오는데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명동성당 앞에서는 여전히 거리공연이 있구나, 하며 반가운 마음에 걸음을 재촉했다. 80년대 중반부터 이어져온 명동성당 앞 공연. 심장병 어린이들을 돕기 위한 모금 공연이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기억과 함께 쌍둥이 듀오 가수 <수와 진>이 떠올랐다. 꽤 많은 가수들이 명동거리공연을 통해 주류로 떠났고 그 과정에서 순수한 모금활동이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20년 전 그대로 공연하는 사람들

그저 노래 좀 하는 가수겠지 하고 무심코 서서 구경하던 기자는 한 가수를 주목하게 됐고 점점 빠져들었다. 특히 처음 들어보는 노래 <간절히>를 들으며 숨죽이지 않고 분노를 표출하던 내 20대가 떠올랐고 전율이 몸을 휘감았다.


"누구는 뺏고 누구는 잃는가. 험난한 삶은 꼭 그래야 하는가.
앞서서 산 자와 뒤처져 죽은 자. 그 모든 눈에는 숨 가쁜 눈물이,
왜 이리 세상은 삭막해 지는가. 아! 나는 오늘도 간절히 원하지.

거리로 내몰린 수많은 사람과 오늘도 여전히 불안한 사람들.
모두들 제각기 제 길을 가지만 난 아직 오늘도 간절히 원하지.
내 할 수 있을 때 일하는 세상. 내 일한 만큼만 갖는 세상을.

누구를 밟고 어디에 서는가. 왜 같은 우리가 달라야 하는가.
살아남기 위해 그렇다 하지만 그 모든 눈에는 고독한 눈물이
왜 이리 갈수록 지쳐만 가는가. 아, 나는 오늘도 간절히 원하지.

간절히, 간절히, 간절히, 간절히, 아 음…. 간절히, 간절히, 간절히, 간절히, 아 나는 오늘도 간절히 원하지. 간절히, 간절히, 간절히, 간절히…."


꾸미지 않은 투박한 목소리. 혼신을 다 한 열창. 가사 마디마디 배어있는 녹록치 않은 삶의 무게. 기자는 공연이 다 끝날 때까지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

우리는 시간을 나누기 위해 여기 나옵니다

연영석씨와 그의 선배 박준씨가 해떨어지기 전에 공연을 시작하자, 기자는 20년도 더 지난 옛날이 떠올랐다.
연영석씨와 그의 선배 박준씨가 해떨어지기 전에 공연을 시작하자, 기자는 20년도 더 지난 옛날이 떠올랐다. ⓒ 이동환
지난 24일(월). 그를 처음 본 뒤 40여 일이 지나 기자는 명동을 다시 찾았다. 인터뷰 약속 시각은 오후 다섯 시. 이미 그들 일행은 짐을 풀고 공연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매주 월요일 오후 여섯 시쯤부터 밤 열 시까지 모금공연을 한단다. 공연의 목적은 예전과 달리, 준비 중인 <들불장학재단>을 돕기 위함이다. 해고노동자, 그리고 비정규직과 외국인노동자들의 자녀교육에 힘을 보태기 위한 모금활동이다.

알고 지내던 사이가 아니라 몰라봤을 뿐, 알 만한 사람을 만났다. 바로 20여년 세월을 변함없이 명동 공연을 주선해온 '박준'씨다. 그는 2002년 말부터는 <들불장학재단>을 설립하기 위한 모금공연에 매주 월요일을 할애하고 있는 사람이다. 80년대 중반부터 명동거리공연을 벌여온 지킴이다. 다른 사람을 돕기 쉽지 않은 세상에 애쓴다고 인사를 건네자 박준씨는 손사래를 친다.

강산이 두 번 바뀔 동안 변하지 않고 모금공연을 주선해 온 박준씨.
강산이 두 번 바뀔 동안 변하지 않고 모금공연을 주선해 온 박준씨. ⓒ 이동환
"돕다니요? 누가 누구를 돕는다는 생각,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시간'을 나누는 것뿐이지요. 겸허하게, 자기가 가진 시간을 나눈다는 생각, 그게 바로 이십여 년 동안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지탱해준 힘입니다. 후배들도 그건 마찬가집니다."

연영석씨와 박준씨가 기타를 치며 공연을 시작하자 여기저기 앉을 곳을 찾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말끔한 양복 차림에 신사 두 사람이 한 잔 걸친 듯,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춤을 추며 흥을 내기 시작했다.

가끔, 오가는 사람들이 모금함에 정성을 넣었다. <들불장학재단> 이름으로 걸린 현수막을 꼼꼼히 읽어보는 사람, 가던 걸음을 잠시 멈춰 웃음 띤 얼굴로 공연을 보다 가는 사람, 꼬깃꼬깃한 돈을 어렵게 찾아내 주저 없이 넣는 허름한 차림의 아주머니.

가수보다는 문화노동자로 불리기 원해

노래할 때가 아니면 연영석씨는 너무나 순박한 모습이다.
노래할 때가 아니면 연영석씨는 너무나 순박한 모습이다. ⓒ 이동환
알고 보니 가수 연영석씨는 벌써 세 번째 앨범을 내놓은 터다. 충청북도 괴산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화가가 꿈이었다. 네 번에 걸친 실패 끝에 미술대학 조소과에 입학했고 그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정말 운 좋게' 졸업할 수 있었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반드시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에 매달리게 됐어요. 부모님도 오랜 세월 세탁소를 운영하며 정말 앞만 보고 사셨지만 경제적으로 늘 걱정이 많으셨거든요. 그러다가 노동미술운동에 뜻을 품은 미술인들과 진보 미술 동인 <현실감각>을 세웠지요."

세상의 중심이 노동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그는 노동운동현장을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1997년에는 정치풍자를 내용으로 하는 작품들을 <일러스트 조각전>에 출품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노동자 문제에 계속 집착할 수밖에 없던 그는 이른바 '민중미술'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고뇌는 사라지지 않았다. 작업실에 틀어박혀 노동자들과 동떨어진 미술작업만으로 그들과 가까워질 수 없다는 생각이 그를 괴롭혔다.

"그때부터 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노래를 만들었어요. 그러다가 록밴드 <천지인>의 공연에 펑크 낸 가수 대신 얼떨결에 무대 데뷔를 하게 되었지요. 노동운동현장을 찾아다니며 그들과 함께 하는 노래를 만들고 부르며 비로소 제가 할 일을 찾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가수라기보다 문화노동자라 부른다. 노동자와 함께 어우러지기 위한 문화를 생산하는, 동일한 노동자로 여겨지기를 바란다. 기자는 그의 노래를 들으며, 그와 대화하며 발전의 그늘에 가려진 노동자들의 땀과 삶에 순수하게 동참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참 예술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사회 모순을 숨기지 않고 얘기할 수 있는, 그래서 삶과 작업이 따로 떨어지지 않은 예술이 참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래는 더욱 그렇지요. 노동자들과 언제나 함께 하는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일이 그래서 제게는 중요합니다."

사진 위부터 1집(1999년)<돼지 다이어트>, 2집(2001년)<공장>, 3집(2005년)<숨>.
사진 위부터 1집(1999년)<돼지 다이어트>, 2집(2001년)<공장>, 3집(2005년)<숨>. ⓒ 이동환
노래할 때와 달리, 얘기를 나눌 때 주의 깊게 본 그의 모습은 순박한 시골 청년의 '이미지'였다. 앨범과 홈페이지에서 '게으른 피'라고 스스로를 표현한 이유를 물었더니 주저하지 않고 목소리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경쟁사회 속에서 그 틀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흔히 게으르다고 낙인찍히잖아요. 경쟁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틀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게으른, 그래서 쓸모없는 사람들이라고 여겨진다면 저 역시 게으른 사람일 수밖에 없고요. 반자본주의 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특히 위험(?)하게 보잖아요. 저는 뒤처진 사람들과 하납니다. 그래서 '게으른 피'라고 했지요."

그와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굳게 악수를 나누었다. 그의 눈빛은 순했지만 가슴놀이 뒤편에 감춘 '동료 인간에 대한 겸허한 애정'과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절규하는 뜨거운 속내가, 악수를 나누는 잠깐 사이나마 기자에게 전해졌다. 기자는 움찔하며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 자기만 꾸미는 마음, 자기만 성공하는 기술, 같은 생각들이 각광받는 요즘, 저런 가수를 만나다니 기자에게는 행운이요, 보람 있는 경험이었다.

덧붙이는 글 |

바로 가기 클릭 ☞ <게으른 피>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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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커서 '얼큰샘'으로 통하는 이동환은 논술강사로, 현재 안양시 평촌 <씨알논술학당> 대표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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