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재선거가 던지는 질문은 두 개다. 하나는 노무현 대통령을 향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보세력을 향한 것이다.
하나.
<한겨레>는 10.26재선거 결과를 분석하면서 이런 평을 달았다. "대연정 등 불필요한 정치적 논란을 일으켜 지지층의 이반을 자초했다." 또 울상이 돼 버린 열린우리당의 전병헌 대변인의 코멘트는 이런 것이었다. "대구에서 망국적 지역구도를 깰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에 주목한다."
이 두 개의 평을 종합하면 어떤 얘기가 도출될까? 국민 스스로 지역구도를 깨기 위해 노력 중인데 오히려 노 대통령이 '헛발질'을 함으로써 화를 불렀다는 얘기다.
10.26재선거 결과는 분명 그런 흔적을 남기고 있다. 대구 동을의 득표율 차는 8%다. 표수로 따지면 6천표가 채 안된다. 4.30재보선 때 경북 영천지역에서 나타난 '콘크리트표 균열 현상'이 재연된 것이다.
이 사실은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물론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까지 나서 총력전을 폈던 것을 감안하면 꽤 의미있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14대 총선 이후 한나라당 후보가 단 한번도 당선된 적이 없는 부천 원미갑에서 한나라당 후보가 열린우리당 후보를 17%포인트 차로 가볍게 따돌렸다.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예전 같으면 이 지역 호남 출신 유권자들 가운데 한나라당 지지자는 10% 미만이었는데 이번엔 25% 이상이 지지하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한다.
영남과 호남 표쏠림 현상이 완화되고 있다는 소식은 'by 노무현'이 아니라 'by 국민'의 지역구도 극복이 가능함을 뜻하는 것이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민심이 꼭 진리를 담는 건 아니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민심이 꼭 진리가 아니라면 정치지도자가 달리 갈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요지의 말도 했다. 그러면서 내놓은 방안이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이었다.
지역구도 극복이란 대명분에 동의하면서도, 그것을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으로 등치시키는 노 대통령의 '고집'에 의아해 했던 국민은 10.26재선거를 통해 이렇게 묻고 있다.
국민을 믿고 '정상'과 '상식'의 길을 걸을 의향은 정녕 없었는가? 지역구도를 일거에 뒤엎으려는 발상 자체가 조급증에 기반한 과욕은 아니었는가?
진보세력, 제자리걸음 또는 퇴보 양상
둘.
10.26재선거 결과를 분석하면서 거의 모든 언론이 빼놓지 않은 게 '보수층 결집'이었다. <한겨레>는 "한나라당이 집요한 이념 공세로 보수층의 결속을 이끌어"냈다고 분석했고, <중앙일보>는 "'강정구 파문'에 보수층이 뭉쳤다"고 진단했다. <조선일보>는 '강정구 파동'이 열린우리당에 악재로 작용했다고 봤고, <서울신문>도 열린우리당이 '강정구 파문'의 유탄을 맞았다고 보도했다.
고민은 이 지점에서 싹튼다. 한나라당의 집요한 이념공세를 탓하는 건 무력하다. 그보다 더 중한 문제는 한나라당의 집요한 이념공세가 유권자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사실이다.
이런 문제제기에 쉽게 들이댈 수 있는 반박논리는 재보선의 특징, 즉 낮은 투표율이다. 상대적 고령층, 상대적 보수층이 집중 투표하는 재보선 결과를 놓고 전체 민심을 재는 건 성급한 일반화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을 10.26재선거에 곧장 적용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40.4%의 투표율을 높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쳐서는 안되는 게 있다. 40.4%의 유권자가 보여준 민심의 흐름이 전 국민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 결과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쉽게 흘려 넘길 수 없는 게 또 있다. <중앙일보>의 최근 조사 결과, 자신의 이념 성향이 '진보'라고 답한 사람이 2003년 2월 34%에서 21%로 떨어진 반면 '중도'는 35%에서 40%로 늘어났다.
이런 추세를 반영하는 조사가 또 있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홍두승 교수가 연구한 결과, 자신의 이념성향을 '보수'라고 응답한 사람이 90년 38%에서 올해 48%로 늘어났다. 반면 '진보'라고 응답한 사람은 21%에서 25%로 소폭 증가하는 데 그쳤고 '중도'는 41%에서 26%로 떨어졌다.
두 조사에 편차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진보세력이 제자리걸음 또는 퇴보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럼 이런 경향이 뜻하는 바는 뭔가? <중앙일보>의 조사대상 기간은 참여정부 집권기간을 관통하고 있다. 홍두승 교수의 조사대상 기간은 문민정부부터 참여정부를 아우르고 있다. 이른바 탈권위주의 시대, 민주화 시대의 진보세력 성적표가 형편없다는 것이다.
왜일까?
왜일까? 진단은 다양하게 나올 수 있다. 정책 방향을 잘못 잡은 결과일 수도 있고, 방향만 세우고 실천을 못한 지리멸렬한 태도가 원인일 수도 있다. 아니면 이 두가지 모두가 교차작용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대답을 이 자리에서 도출할 수는 없다. 광범위한 소재를 하나의 체계에 편입해 원리를 추출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과 식견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선 그 실마리를 더듬는 데 만족하자.
실마리 1. 국민의 정부는 보수층의 극렬하고도 집요한 견제에도 불구하고 햇볕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했다. 그 결과 햇볕정책의 당위성과 필요성에 대한 이견은 상당 부분 해소됐다. 한나라당도 전략적 상호주의를 상호공존정책으로 전환했을 정도다.
실마리 2. 참여정부 들어 이른바 4대 입법을 핵심 개혁과제로 설정했지만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여야 합의로 가까스로 통과시킨 언론법은 두고두고 뒷말을 남기고 있고, 국가보안법과 사립학교법은 '그냥 그대로'인 상태다. 소득은 없었고 분란은 증폭됐다. 그런데도 열린우리당은 4대입법이 좌절된 올해 초부터 이른바 개혁 대 실용이란 논쟁에 빠져들었다.
사례 3. 홍두승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90년에 전 국민의 8.9%였던 노동자가 올해 29.7%로 대폭 늘었다. 이 기간 동안 노동자를 대변하는 민주노동당은 원외에서 원내로 위상을 격상시켰다.
하지만 10.26재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고배를 마셨다. 노동자 가족이 전체 유권자의 70%를 점한다는 울산 북구에서의 패배였다. 민주노동당의 패배 직전 민주노총은 비리사건으로 내홍을 겪었고, 그보다 좀 더 오래 전에는 대기업 위주의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