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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김강임
아흔을 넘기신 할머니의 머리가 은발이셨다. 은발의 할머니에게 홍시 서너 개를 사들고 가면 늘 파란 지폐 한 장을 내 호주머니에 넣어 주셨다. 홍시 값을 배로 돌려 주신 것이다. 아무리 뿌리쳐도 "손주며느리가 무슨 돈이 있다고 그래…" 하시며 늘 나를 격려해 주셨던 할머니.

그때 홍시를 사 들고 할머니 댁에 들어서면 할머니는 늘 마루 한가운데 앉아서 참빗으로 센머리를 곱게 단장하셨다. 할머니는 머리카락도 별로 없으신데 왜 하루에도 몇 번씩 은발의 머리를 곱게 단장하셨을까? 할머니는 센머리를 곱게 단장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월을 빚어 넘겼으리라. 그러나 그때 나는 몰랐다. 할머니가 센머리를 넘기며 지나간 청춘을 그리워하셨던 까닭을.

그런데 벌써 내 머리에는 할머니의 센머리가 하나 둘 내려 앉았다. 처음 할머니의 센머리 하나가 눈에 띄었을 땐 그 머리카락을 뽑아 내려 안간 힘을 썼다. 그러나 차츰 앞머리에 무더기로 센머리가 이사를 오고 있으니 이제는 손 쓸 재간이 없다.

ⓒ 김강임
제주의 중산간도로를 달리다가 오늘은 산굼부리로 발길을 향했다. 해질녘 산굼부리에는 억새의 군무가 환상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 분화구 등성이에는 할머니의 센머리가 남실거린다. 아니 할머니의 센머리가 흐느낀다.

ⓒ 김강임
은빛 넘실대는 억새밭 길을 걷다가 센머리를 단장 하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화구의 숨구멍 등성이에 가지런하게 피어있는 은발의 억새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할머니의 센머리는 나부끼는 듯하다. 늘 내 머리를 어루만지며 검은 머리를 탐내셨던 할머니. 그때 나는 할머니의 센머리를 왜 그렇게 무심했던가?

이제 할머님은 떠나시고 세월이 흘러 내 머리에 할머니의 센머리가 내려앉으니 억새 꽃 밭에는 늙어도 늙어도 변하지 않는 할머니의 센머리가 가득하다.

ⓒ 김강임
백록담의 깊이보다 더욱 깊은 산굼부리 분화구에도 할머니의 센머리가 바람에 춤을 춘다. ‘굼부리’ 산책로 억새 꽃밭은 참빗으로 가르마를 타시고 동백기름을 자르르 발라 비녀를 꽂으셨던 할머니의 낭자머리가 은빛으로 물들었다.

ⓒ 김강임
지금 화구의 숨구멍에는 허옇게 할머니의 센머리가 늙어가고 있다. 그리고 할머니의 센머리는 내 머리에 하얀 핀을 꽂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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