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접하기 전까지 '자크 르 고프'란 이름은 나에게 무미건조한 이방인의 체취로만 다가왔다. 그러나 이 책을 한 장씩 읽어나가는 동안 '자크 르 고프'란 이름에 대한 생경함은 빠르게 희석되어 갔다.
자크 르 고프는 국내에 대중적으로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 전세계 지성인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는 중세학의 대가(大家)이자 역사학도들에겐 '아날학파(Annales School)'의 제3세대로서 익숙한 존재다.
'아날학파'란 랑케의 사실주의 역사학에 대한 반발로 태동한 역사학으로, 기존의 역사가들이 중시하던 정치적 사건이나 위인, 연대(年代) 등에서 탈피해 정치보다는 사회경제, 개인보다는 집단, 연대보다는 구조를 중시하는 특징이 있다. (<파스칼 백과사전> 참고)
그와 같은 특성은 이 책 <중세를 찾아서>에도 반영되어 있는데, 자크 르 고프와 장-모리스 드 몽트르미의 길지도 짧지도 않은 대담 속엔 중세의 사회, 경제, 법, 도시, 신분, 종교 등에 대한 역사학ㆍ사회학적 통찰이 짙게 배어 있다. 평소 인문ㆍ사회과학 분야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일독해 볼 만한 책이다.
이 책은 총 6개의 구획으로 나뉘어 있는데, 책의 크기가 아담하고, 각각의 구획은 소책자 분량밖에 되지 않아 집중적으로 읽는다면 하루 이틀이면 완독이 가능하다. 1장에는 자크 르 고프가 역사학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와 역사학자로서의 철학이, 2장~5장에는 중세사회에 관한 대담이, 마지막 장에는 저자의 에필로그가 담겨 있다.
장-모리스 드 몽트르미는 이 책의 '머리말'에서 위대한 중세학자의 첫 걸음을 소급하며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자크 르 고프는 아주 일찍부터 중세를 찾아 나섰다. 모든 것은 한 어린 독자의 감동에서 시작되었다. <아이반호>의 숲, 매력적인 인물들, 월터 스콧, 역사소설….
자크 르 고프 역시 1장에서 월터 스콧의 <아이반호>를 반복적으로 언급하며 이 증언에 힘을 실어준다. 그가 어린 시절 <아이반호>를 읽으며 느꼈던 감동은 중세에 대한 강렬한 첫인상을 형성하며 그의 진로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이후 그는 중세에 관한 깊이 있는 통찰과 연구 성과로 전세계에 명성을 떨치게 된다.
중세에 대한 잘못된 인식
흔히 우리는 중세를 '암흑시대'로만 기억하는 경향이 있는데, 자크 르 고프의 표현에 의하면 중세는 '위대한 천년'이며, 중세에 대한 부정적 인식 또한 무지와 왜곡의 소산에 불과하다. 그는 '중세'란 용어 자체의 결함을 지적하며, 중세, 즉 중간 시대라는 시대 구분을 일방적 횡포로 간주하기도 한다.
또 한 명의 뛰어난 석학 크레인 브린튼은 <서양사상의 역사>(을유문화사, 1993, 184쪽)에서 중세의 시대 구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 바 있다.
..중세라는 용어 그 자체가 하나의 가치 판단인바, 원래 그것은 폄론적(貶論的)인 것이었다. 이 용어를 주조해 낸 사람들에게 있어서 중세 천 년은 고대와 근대의 두 거대한 봉우리 사이에 있는 계곡 내지 저락의 시기였다. 이 '중세'란 용어와 라틴어에서 유래된 'medieval'이란 말이 일반적인 용어로 확고하게 쓰이게 된 것은 18세기 계몽사상에 의해서였다. 19세기에 들어와서는 고대, 중세, 근대로 시대를 구분하는 삼분법(三分法)이 확정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서양 사람들은 심지어는 이 구분을, 그러한 구분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중국의 역사에까지 적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정된 재래적 술어는 한 가지 뚜렷이 좋은 점이 있다. 즉 그러한 술어는 그것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칭찬 또는 비난의 의미를 대부분 잃어버린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는 '중세'를 유럽 역사에 있어서 대체로 500년에서 1500년에 이르는 1000여 년의 기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 1000여 년 가운데 초기 세기들 즉 500년으로부터 900년 내지 1000년에 이르는 기간은 지금도 가끔 암흑시대라고 불리는데, 이 암흑시대라는 술어는 계속적인 사용에 의해서도 그것이 함축하는 비난의 요소들을 완전히 씻어 버릴 수는 없었다. 엄밀한 의미의 중세는, 다소 중복되는 부분과 또 많은 정확하지 못한 점들이 있기는 하지만, 9세기의 샤를마뉴(Charlemagne, 742~814)에서 15세기의 콜룸부스(Christopher Columbus,1446?~1506)에 이르는 기간으로 생각되고 있다...
자크 르 고프와 크레인 브린튼은 공통적으로 '암흑기 중세'와 '이상화된 중세' 등으로 파편화되어 있는 중세의 이미지를 원형 그대로 복원하고자 노력했다. <중세를 찾아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 책을 읽다 보면 현대사회를 구축하고 있는 다양한 개념들, 가령 도시, 상인, 은행 등이 중세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걸 알게 되는데, 이는 중세가 고대와 근대 사이의 계곡이 아니라 두 봉우리를 이어주는 다리임을 방증한다.
그 외에도 4장에는 '연옥'에 대한 역사학ㆍ사회학적 고찰이라 할 만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자크 르 고프는 '연옥'에 관한 책을 따로 저술하기도 했는데, 그는 '연옥'을 중세인들의 발명품이라고 단언한다. 지옥과 천국이란 추상적인 관념을 대신해 중세인들에게 보다 현실적인 위안과 안정을 주는 개념으로서 연옥이 고안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관한 흥미로운 대담은 책에서 직접 확인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자크 르 고프의 <중세를 찾아서>는 중세를 집대성한 백과사전이나 정밀한 항해 지도에 해당하진 않지만, 독자의 발길을 중세로 잡아끄는 마력을 지닌 초대장임에 분명하다. 일단 책을 읽기만 하면 중세에 관한 알려지지 않은 진실, 고대와 근대를 매개하는 중세의 다채로운 면모가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완성도 높은 번역에 힘입어 매혹적으로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