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질주가 마치 자동차의 속도전을 방불케 하는 고속도로를 피해 무작정 한적한 길로 방향을 잡은 것이 화천서 가평에 이르는 75번 국도였습니다. 파란 하늘과 점점이 뭉쳐져 있는 흰 구름, 거기에 온 산을 휘둘러 감은 단풍. 가을은 절로 감탄사를 자아내게 하는 아주 훌륭한 수채화 한 점을 그렇게 완성시키고 있었습니다.
계곡을 따라 한참 달려 차를 멈춘 곳은 용소폭포였습니다. 경기도 가평군 북면 적목리에 위치한 용소폭포는 울긋불긋한 가을 계곡에 숨은 듯 수줍게 들어앉아 있었습니다.
용이 승천하는 장면을 임신한 여인에게 보이는 바람에 그만 낙상하여 소를 이루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용소폭포는 파란 가을하늘을 머리에 인 채 또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폭포에서 쏟아진 하얀 물줄기가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파란 소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쨍하고 갈라질 듯한 차가운 물위로 점점이 떠다니는 나뭇잎들은 오히려 따스한 정겨움을 나누고 있는 듯했습니다.
나뭇잎을 후후 불며 얼굴을 비쳐 보았습니다. 순간순간을 온갖 욕심들로 덕지덕지 칠갑 하고 하루하루를 늘 아등바등 거리며 어리석은 미련을 떨어대는 한 인간의 모습이 수면위로 떠올랐습니다.
손을 씻고 얼굴을 씻었습니다. 욕심을 씻어내고 어리석은 미련을 씻어내고자 했습니다. 내 안에 고여 썩고 있던 일상의 허접한 것들을 모조리 씻어내고 싶었습니다. 그것조차도 욕심인 것을.
지나간 내 삶의 과오들이 그 한순간에 다 씻겨지기를, 하여 명경지수에 온전하게 말끔한 모습으로 비춰지기를 기대하고 있었으니. 아, 이 어리석음의 극치여.
용소폭포에서 한 뼈저린 반성을 가슴에 새기며 다시 차를 달려 도착한 곳이 남이섬이었습니다. 작년 여름 결혼기념일에 맞춰 우연히 들렀던 남이섬. 그때 전나무 숲길을 걸으며 남편과 약속한 것이 있었습니다.
"한 해 동안 우리 또 열심히 살자. 그리고 내년 결혼기념일에 다시 와서 정말 열심히 살았는지 되짚어 보는 거야."
남이섬의 가을은 색색의 향연으로 이미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 가고 있었습니다. 거기다 수많은 인파들이 빚어내는 알록달록한 원색의 옷차림. 빨간 단풍잎을 닮은 듯, 노란 은행잎을 닮은 듯, 하하 호호 번져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길 위를 수북하게 뒤덮은 낙엽들의 푹신함.
남이섬은 굳이 <겨울연가>의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이 가을 누군가를 맘껏 사랑하고픈 충동에 휩싸이게 할 만큼 젖어들고 있었습니다.
결혼기념일을 두 달이나 넘기고서야 다시 찾게 되었지만 남편이나 제겐 한해를 돌아보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람 사는 것이 늘 그날이 그날이다 보니 1년 사이에 뭔가 눈에 확 띄는 변화를 기대하기는 대개가 어려운 법. 하지만 1년 전에 섰던 그 자리에서 그때의 다짐을 되짚어 보는 건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기쁘고 즐거웠던 순간보단 아쉬웠던 순간을 함께 되새겨보았습니다. 서로 보듬고 위로했던 순간보단 상처내고 할퀴었던 순간을 서로 미안해하며 뒤늦게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촌수조차 매길 수 없는 무촌의 부부사이. 가깝기에 더 서운함을 느꼈을 수도 더더욱 소중함을 망각했을 수도 있었기에 앞으로의 세월은 더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더 깊이 감싸 안으리라 또 다시 손을 맞잡고 내년을 약속했습니다.
눈이 시리게 푸르던 싱싱함으로 한 계절을 향유하던 나뭇잎들. 바스락거리며 떨어지기 전까지도 이렇듯 고운 색을 머금었습니다. 그건 바로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겸허함이었습니다. 잎이 푸르던 여름에도 잘났다 호들갑떨지 않았고 곱디고운 색으로 젖어들어 우리를 충분히 감동시키는 이 가을에도 결코 드러내 자랑하지 않습니다.
대자연 앞에 내놓자면 저란 사람은 티끌만도 못한 참으로 미미한 존재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쳐 나는 자만심에 호들갑 떨며 드러내 자랑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내어준 것 하나에도 생색내기를 고집하였습니다. 남이섬의 가을은 살갗을 스치는 바람으로 코끝을 스치는 낙엽냄새로 이렇듯 겸허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남편과 딸아이는 빨갛고 노란 단풍의 바다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마냥 신이 났습니다. 얼마나 뛰고 굴렀는지 남편의 얼굴도 딸아이의 얼굴도 빨간 단풍잎처럼 발그레하게 물이 들었습니다. 파란 가을하늘로 울려 퍼지는 남편과 딸아이의 행복한 웃음소리는 노란 은행잎만큼이나 밝고 화사합니다. 그들의 발그레한 얼굴이 그들의 노란 웃음이 저를 물들이고 있습니다. 빨갛고 노란 곱디고운 행복이라는 단풍으로.
늦은 밤. 하루 동안의 짧은 여행에 피곤할 법도 하련만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자꾸만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이젠 채우지 못하는 것들로 불행을 손꼽지 않아야겠습니다. 열손가락을 다 구부려도 한참 모자라는 나를 둘러싼 행복의 조건들. 그것들을 사랑해야겠습니다. 남이섬의 가을이 저로 하여금 그것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내일이면 다시 똑같은 일상과 마주할 것임이 분명하건만 그 내일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저를 찾아와 줄 것 같습니다. 좀더 배려하고 좀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시월 끝자락의 어느 하루. 그 하루가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음을 내년 이 시간에 다시금 되짚어 보기를 스스로 약속하는 지금입니다. 하여 앞으로 하루하루는 분명 어제와 다르게 살아가야 감을 또한 약속하는 지금입니다.
덧붙이는 글 | <10월 여행 이벤트 응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