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누렇게 바랜 저 잎새들마저 곧 다 떨어지고 헐벗은 가지만 남겠지. 그래서 가을은 아름다우면서도 쓸쓸한 게지(안양시 평촌 학원가 가는 길).
누렇게 바랜 저 잎새들마저 곧 다 떨어지고 헐벗은 가지만 남겠지. 그래서 가을은 아름다우면서도 쓸쓸한 게지(안양시 평촌 학원가 가는 길). ⓒ 이동환
"가로수고 뭐고 이제 모두 다 갈색이야. 봤지? 바람도 제법 매섭고, 추웠지? 가을에는 괜히 옆구리가 시려. 당신은 안 그래?"

잉걸아빠 진짜 간만에 일찍 들어온 저녁. 밤바람이 차다고, 늦게 퇴근하면서 잔뜩 웅숭그리는 아내가 딱해 보여 갈비뼈가 부서져라 한 번 되우 안아준 다음 던진 말이 화근이었다. 거 뭐, 핑계 삼을 말도 아니구먼, 아내는 밖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나보다.

"배가 잔뜩 부르신 모양이네? 옆구리가 시려? 당신 지금 가을타령 하는 거예요? 철없이? 아직도 사춘기야?"

이 여자, 왜 이래? 학생들이 또 떨어졌나? 메기주둥이처럼 입술을 왜 댓 발이나 내밀고 야단이람? 그러고 보니 평소와 달리 내 품에 안긴 자세가 다르다. 엉덩이를 빼고 무게 실리지 않게, 왜 거 TV에서 보면 오랜만에 만난 사이에 인사랍시고 부둥켜안기는 하는데 어째 어색한 모양, 거 왜 있잖소?

기분이 영 싸했지만, 그 시간까지 그깟 밥 한 끼 사먹지, 한 푼 아끼자고 참느라 배가 고팠던지 허겁지겁 저녁이랍시고 들이붓는 모습을 보니 금세 측은해져서 잉걸아빠, 괜히 너스레를 떨어본다.

"여보, 이 가방 봐! 짜자잔! 원하던 대학에 아들 녀석 합격했다고 학부모가 보내주신 가방이야. 너무 귀엽지? 아주 싸구려는 아니다."

가방을 째려보는 눈초리가 어째 성질 고약한 가자미 찢어진 눈보다 더 하다.

"세월 참 좋아. 학원 강사도 촌지 받네 이젠, 흥!"

"촌지?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다시는 그 학생 가르칠 일 없으니 관계 끝나고 헤어지는 마당에 고마운 마음으로 주시는 걸 그럼 받지 말란 말이야? 기껏해야 한 십만 원 하는 선물을?"

"기껏해야 한 십만 원? 선물? 선물이 촌지고 뇌물이지, 당신 만날 혼자 도도한 척 양심 있는 척 하더니 다 똑 같네 뭘!"

이 여자, 진짜 오늘 왜 이래? 어머니도 아직 안 주무시는데, 밖에서 뭘 잘 못 먹었나? 잉걸아빠도 '한울컥' 하는 성미에 옛날 같으면 손에 쥔 아무 거나 장롱 문짝에다 내던질 판이다. 분위기가 어째…. 잉걸아빠 상판대기에 웃음이 싹 가셨다. 그렇다고 밥 먹는 사람 앞에서 씩씩거릴 수는 없는 일. 오메, 오늘 저녁 분위기 '징허게' 마뜩찮네! 대충 아무거나 걸치고 슬리퍼를 찍찍 끌며 동네 한 바퀴 돌고 올밖에. 내가 이래서 담배를 못 끊어!

괜히 다투지 말고 우리 영화 얘기나 합시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 포스터. 사랑과 이별에 관한 쓸쓸한 회상록.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 포스터. 사랑과 이별에 관한 쓸쓸한 회상록. ⓒ 유니버설 영화사
동네 언저리 두 바퀴나 돌고 오니 맨발에 반바지, 슬리퍼는 좀 무리였는지 발이 된통 시리다. 슬쩍 보니 컴퓨터 앞에 아내가 앉아 있다.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은 작은 냄비가 폴폴 끓는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 추억 하나 기억 사이?"

내가 쓰다 만 글을 읽었나보다. 냄비에 끓는 게 뭐냐니까 내가 좋아하는 고기만두란다. 한 쪽에 보니까 쟁반에 그새 소주 한 병이 놓여 있다. 반찬이나 안주가 그저 그럴 때 잉걸아빠는 고기만두 삶아 건져 새금하게 익은 깍두기 국물 잔뜩 끼얹은 다음에 사각거리는 깍두기와 함께 소주 한 잔 캬! 그냥 엎어지는 메뉴걸랑.

"아웃 오브 아프리카, 옛날에 누구랑 봤어?"

"혼자 봤지. 나 원래 무슨 공연이나 음악회, 영화 좀 진지하게 보려면 혼자만 가는 거 알잖아? 여태 그걸 몰라?"

"사실 대로 말 하셔. 화 안 낼 게. 어떤 여자야?"

만두가 자꾸 목에 걸린다. 오늘은 어째 술 안마시고 싶은데 아내가 자꾸 따라주니 마실 수밖에. 싸운 것은 아니지만 깐에 화해주랍시고 차려놨는데 안 마시면 또 싸움거리 되게?

광활하면서도 황량한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세 남녀의 사랑, 그리고 기억.
광활하면서도 황량한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세 남녀의 사랑, 그리고 기억. ⓒ 유니버설 영화사
"당신, 총각 때 소문 난 바람둥이였다며?"

"누가 그래? 거 말도 안 되는 소리! 누가 나 같은 삼팔따라지 자식한테 눈길 줘, 주기를?"

"당신 옛날 친구들한테 다 들었어. 추억 하나 기억 사이? 그래, 그 추억 다 좋아. 그런데 그 여자 누구야? 아웃 오브 아프리카 함께 본 여자, 한 번 말해 봐요. 내가 바빠서 못 보는 거 같아도 당신이 쓴 글 다 본다고. '지금 그 여자 이름은 잊었지만(내가 쓴 글 표제)?' 내가 사무실에서 선생님이랑 우연히 그 글 클릭했다가 얼마나 무안했는지 알아?"

"왜 무안해? 뭐 아닌 얘기 했나?"

"당신은 그게 문제야. 지나치게 솔직하다는 거.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도대체 신경 안 쓰니까. 지난번에 삼성 어쩌고 하는 얘기도 내가 분명 쓰지 말라고 했지? 포털사이트 욕지기 댓글도 모자라 아웃룩을 못 열 정도로 메일이 쇄도했을 때 내 뭐랬어요? 당신 제자들도 블로그에 드나들 텐데 진짜 왜 그래?"

여자여, 아니 내 아내여! 잉걸아빠가 바쁜 와중에도 블로그 관리하는 이유는 이미 한참 전에 당신에게 말했다. 까마귀 고기 잡쉈나? 남길 거라고는 덜 익은 글밖에 없는 평생 책상물림 잉걸아빠. 있는 모습 그대로, 사는 모양 그대로 글 쓰고 남긴다는 데 뭐 꾸밀 일 있나?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잉걸아빠를 반거들충이로 보든 말든, 주책없는 치로 여기든 말든,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쓰고 누가 어떻게 평가하든지 신경 안 쓰겠다는데 왜?

머리만 감겨줘? 나는 때까지 밀어 주잖아!

잉걸엄마! 머리 감겨주던 저 장면이 그렇게 가슴 저미도록 부러웠어? 이제 잉걸아빠가 있잖아.
잉걸엄마! 머리 감겨주던 저 장면이 그렇게 가슴 저미도록 부러웠어? 이제 잉걸아빠가 있잖아. ⓒ 유니버설 영화사
"처녀 때 한 때, 아니 주변에서 노처녀 시집 언제 가느냐고 스트레스 팍팍 줄 때, 퇴근만 하면 집에서 닥치는 대로 비디오 빌려다가 본 적 있어요. 그때 이 영화 본 거 같아. 기억나는 건 '로버트 레드포드'가 '메릴 스트립' 머리 감겨주던 장면이에요. 난 언제나 저런 멋진 남자가 머리 한 번 감겨주나 생각하면서…."

"푸힛! 여기 있잖아. 나, 잉걸아빠!"

"어이구! 당신이 로버트 레드포드랑 비교가 돼? 호호호!"

"로버트 레드포드는 이제 할아버지걸랑? 꿈 깨셔. 할아버지보다는 그래도 잉걸아빠가 나을 걸? 머리만 감겨줘? 구석구석 당신 때까지 밀어 주잖아!"

밖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매섭게만 치뜨던 아내 눈초리가 겨우 내려앉았다. 밖에서 있던 일은 묻지 말아야지.

"여보, 잉걸엄마! 벌써 11월이야. 우리 결혼기념일 얼마 안 남았어. 일만 저지르는 남자랑 살아줘서 고마워. 그래도 나 요새 돈 좀 벌잖아. 좀 봐줘. 갑자기 날씨 쌀쌀해지니까 괜히 짜증나지? 무릎은 좀 어때? 글루코사민 잔뜩 사다놨어. 꼭 챙겨 먹어."

남편이 바뀌었다면 '카렌'이 행복했을까(잉걸아빠)? 역마살 끼기는 둘 다 똑 같지 않아요? 하기야 남자들 뭐 다 그렇지(잉걸엄마).
남편이 바뀌었다면 '카렌'이 행복했을까(잉걸아빠)? 역마살 끼기는 둘 다 똑 같지 않아요? 하기야 남자들 뭐 다 그렇지(잉걸엄마). ⓒ 유니버설 영화사
새근새근, 얕게 아내 코고는 소리가 들린다. 아주 평안한 낯빛으로 잠들어 있다. 저렇게 온화하게 생긴 여자가 때로 화나면 무섭다. 다 잉걸아빠 때문에 독해진 거다. 사업이니 뭐니, 가르치는 일 말고는 잘 하는 게 하나도 없는 잉걸아빠가 친 사고 때문에 고생하느라 조금, 그야말로 눈곱만큼 독해진 까닭이다.

뒤바람이 잠시 겁을 줬는지 창밖 나무들이 후두둑, 몸서리를 친다. 문을 열어보니 가느다란 달빛을 이고 하염없이 낙엽이 지고 있다. 높은 데서 누가 부러 쏟아 붓는 듯, 잉걸아빠 황량한 가슴에 담길 새도 없이 마구 흩뿌려진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는?

▲ 영화 음악 CD 겉종이
ⓒ유니버설 영화사

감독 : 시드니 폴락(Sydney Pollack)
주연 : 로버트 레드포드(Robert Redford), 메릴 스트립(Meryl Streep)
음악 : 존 베리(John Barry)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K. 622)과 함께 펼쳐진 아프리카 대륙, 그 장엄한 풍광만 가지고도 사로잡히기에 충분한 영화로 유니버설 영화사가 제작했다(1985년). 한국 개봉은 다음 해인 1986년 12월이었는데 잉걸아빠는 한 여자와 헤어지고 시린 가슴을 안은 채 혼자 이 영화를 봤다. '우피 골드버그'를 만난 그 즈음에. 덴마크 출신 여성 작가 '이자크 디네센'이 1937년에 쓴 회상록을 바탕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실화나 진배없다.

줄거리 : 덴마크에 사는 '카렌(메릴 스트립 분)'은 막대한 재산을 가진 독신 여성이다. 그녀는 친구인 '브릭센' 남작과 아프리카 생활을 꿈꾸며 결혼을 약속한다. 케냐에서 결혼식을 올리지만 커피 재배 문제로 말다툼을 벌이다가 남편이 전쟁터로 떠나 버린다. 혼자 남은 카렌은 어느 날 초원에 나갔다가 사자의 공격을 받게 되고 '데니스(로버트 레드포드 분)'에게 도움을 받는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결국 남편과 이혼한 카렌은 사랑하는 데니스에게 결혼을 요구하지만 매이는 걸 싫어하는 데니스는 그대로 지내기를 원한다. 결국 카렌은 아프리카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바래다주겠노라 굳게 약속한 데니스는 그만 비행기 추락사고로 죽고 만다. 카렌은 쓸쓸히 추억만 남긴 채 아프리카를 떠난다.


덧붙이는 글 | 잉걸아빤, 아무래도 가을을 타는 모양입니다. 철이 덜 난 탓이겠지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얼굴이 커서 '얼큰샘'으로 통하는 이동환은 논술강사로, 현재 안양시 평촌 <씨알논술학당> 대표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