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역사 속으로 가는 길
비운의 역사를 안고 사는 우리로서는 더 이상 통곡할 여유도 없다. 60년이 지난 오늘에도 일본은 여전히 경계해야 할 나라일까? 제주 서귀포에 있는 황우지 해안은 다시 일본을 뒤돌아보게 하는 통한의 현장이다.
황우지 해안은 '남주해금강(南州海金剛)'이라 불리우는 서귀포시 삼매봉 남쪽 바닷가에 위치해 있다. 시민과 관광객이 많이 찾고 있는 외돌개의 동쪽 해안이기도 하다. '황우지'라는 지명은 이 해안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물 설은 이름이다. 그냥 삼매봉 또는 외돌개 바닷가로 알려져 있다. 서귀포시 지명유래집(1999)에 의하면 지형이 황우도강형(黃牛渡江)이라 하여 '황우지(黃牛地)'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황우지 해안으로 가는 오솔길은 울창한 소나무 숲이다. 이 곳에서 잠깐 넋을 놓으면 몽유병을 체험해야 할지도 모른다. 마치 바닷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산속을 헤매고 있다는 자기 최면에 빠져 들기 때문이다. 도시 속에 이런 숲 길이라니, 오랜 세월 보존된 것이 고맙기만 하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동행한 바닷내음, 숲에서 발산하는 공기가 뒤섞여 가슴 속을 순환한다.
해송이 우거진 숲을 가로질러 바닷가 절벽에 닿는 순간 눈 시리도록 푸른 청옥빛 바다가 펼쳐졌다. 한 폭의 수채화를 그린 해안단애가 수려하다. 깊어가는 가을만큼 세월의 연륜이 묻어 있다. 수천년을 한 자리에서 원래의 모습 그대로 바다를 지켜 온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 뿌려진 피와 눈물
황우지 해안으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른 돌계단이다. 계단의 끝에는 또 다른 세상이다. 숲과의 연결고리도 끊어졌다. 주상절리를 이루는 절벽의 모습이 병풍을 펼쳐놓은 듯하다. 커다란 기암괴석이 위압적이다. 신비가 서려 있다. 바위로 둘러싸인 곳의 작은 호수는 물빛이 투명하다. 파도가 밀려오지도 못하고 사라진다. 심산유곡이라는 표현을 쓴다면 오히려 어색할 지경이다.
아! 저기 있다. 통한의 식민지 역사를 피울음으로 기록한 흔적이 생생히 남아 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군사방어용 진지동굴이 그 것이다. 천혜의 비경 속에 갇혀 있는 것은 동굴이 아니라 조국을 잃은 우리 선조들의 부끄러움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강요된 억압, 채찍소리, 말없이 죽어간 슬픈 인생들이 현대사 속의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아직도 저 동굴 속에는 시대의 강을 건너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는 후예들에게 남긴 살기가 묻어 있겠지. 동굴 한 곳에서 고이즈미 총리가 뛰쳐나올 것 같고, 아소 타로, 아베 신조 대신이 잇따라 얼굴을 내밀 것 같다. 소름끼친다. 60년이라면 긴 세월이 아니었던가. 우리 민족 스스로 망령의 동아줄을 끊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식민지 군화발에 짓밟힌 제주섬
1945년 3월 12일, 일본은 연합군의 일본 본토상륙에 대비하여 제주도를 '결 7호작전' 지역으로 선포했다. 연합군의 진격 예상로를 7곳으로 설정하고 그 길을 '막는(決)' 작전이다. 일본은 제주도에 제58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그 휘하에 관동군 병력 7만4781명을 끌어들여 도 전역에서 연합군 상륙에 대비한 진지 구축에 열을 올렸다. 일본 본토를 사수하기 위해 섬 전체를 요새화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다. 일본군으로서는 '옥쇄'의 땅으로 제주섬을 선택한 것이다.
| | | 카미카제를 부추긴 노천명 시인의 '군신송' | | | | “이 아침에도 대일본특공대는/ 남방 거친 파도 위에/ 혜성 모양 장엄하게 떨어졌으리// 싸움 하는 나라의 거리다운/ 네거리를 지나며/ 12월의 하늘을 우러러본다// 어뢰를 안고 몸으로/적기(敵機)를 부순 용사들의 얼굴이/ 하늘가에 장미처럼 핀다/ 성좌처럼 솟는다.”
제2차 세계대전 무렵, 노천명 시인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군신송(軍神頌)'을 지어 바쳤다. 그는 조선의 젊은이들도 전장에 나가 일왕을 위해 목숨을 던지면 군신, 즉 야스쿠니 신사에 이름을 올리는 영예가 주어진다고 부추겼다. 기억 속에만이라도 이런 반민족 친일행위로 얼룩진 굴욕의 때를 벗겨 내야 할 것이다. / 김동식 | | | | |
식민지의 땅에 사는 제주도민들은 노력동원과 물자공출에 강제로 내몰렸다. 이곳 황우지 해안이 일본군에 의해 파헤쳐진 것도 이때다.
일본은 연합군이 상륙하면 어린 병사들로 하여금 카이뗑(回天)이라는 소형어뢰정에 몸을 싣고 함정에 부딪쳐 적과 함께 자폭하도록 훈련시켰다. 이른바 '인간어뢰'를 짊어 질 일본 해상특공대로 '카미카제(神風)'라 부르는 자살공격대이다. 일본은 이 어뢰정을 숨기기 위해 황우지 해안에 모두 12개의 인공동굴을 파 놓았다.
동굴의 폭과 높이가 3m 정도이며, 길이가 10m에 이른다. 곡괭이 하나로 암벽을 쪼갠 흔적이 역력하다. 식민지 백성의 피맺힌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여기에는 제주 섬주민만이 동원된 것이 아니다. 육지 지역의 광부들도 제국주의의 희생받이가 됐다. 그러나 미군이 제주도에 상륙하기 전에 일본이 패망함으로써 그들의 전술도 역사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제주섬에는 아직도 당시 일제의 군사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남제주군 모슬포 알뜨르 비행장 터에는 20여 개의 격납고와 고사포 진지가 있다. 어디 이곳 뿐인가. 송악산 남동쪽 산이수동 해안 절벽, 성산 일출봉의 해안 절벽, 고산 수월봉 해안 절벽, 이곳 황우지 해안 절벽 등 비경이 아름다운 곳에는 어김없이 일본 군국주의의 헛된 망령이 기승을 부렸다.
신비의 옷자락을 적시는 천혜의 비경은 여지없이 군화발에 짓밟혔다. 현재 제주도내 조사된 진지동굴만으로도 113개에 이른다고 하니 그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메울 수도, 메워서도 안될 일본침략사다. 생생한 식민지 역사교과서다.
점령군이 떠난 황우지에도 자연이 살아 속살거리네
황우지 해안에는 바람이 멈췄다. 해안까지 내려 온 기암절벽에는 어느새 뱃고동 소리가 날아와 부딪친다. 자연의 속살이 가슴을 저미는 순간이다. 비운의 역사가 머무는 황우지에도 자연은 살아 호흡하고 있다.
황우지 모퉁이에 핀 해국이 쓸쓸하다. 여러해살이풀이라는데 저 자연의 속살에 곡괭이를 들이댄 잔혹한 역사를 지켜봤을까. 바위틈과 들풀이 무성한 언덕 위에서 연보라빛의 희망을 피운 해국이 말없이 바닷바람과 통신 중이다. 저 작은 키에도 어디서 끈질긴 생명력이 나오는지 궁금하다.
황우지 해안가 언덕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서귀포 바다와 해안풍광이 그림을 그린 듯하다. 가을의 그리움 만큼이나 문섬이 손에 닿을 듯 그러나 먼발치에 떠 있다. 몽고 지배 100년의 역사를 끝내고 마침표를 찍었다는 범섬이 수평선에 걸려 있다. 억새가 내일을 향해 비상 중이다.
점령군이 떠난 황우지해안에도 11월의 가을햇살이 눈부시다.
덧붙이는 글 | <찾아가는 길>
서귀포시내에서 서쪽으로 2km 가면 삼매봉(오름)이 나오고 그 남쪽에 외돌개가 있으며, 황우지해안은 외돌개해안으로 내려가는 길 동쪽 지경에 있다. 서귀포시 천지동 남성마을 안으로 진입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주변명소>
외돌개, 천지연폭포, 이중섭미술관, 소남머리, 정방폭포, 돈내코, 서귀포감귤박물관, 쇠소깍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