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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장에서 보이는 폐교 풍경, 교실터.
운동장에서 보이는 폐교 풍경, 교실터. ⓒ 이승열
"땡 땡 땡" 청동종을 쳐서 수업의 시작과 끝남을 알려 주던 급사 언니의 아버지가 학교의 소사였는데, 아저씨는 키가 작고 다리가 불편한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학교의 어떤 건물인가를 짓다가 지붕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쳤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전교생 모두가 믿고 있었다. 시골의 인간 관계가 늘 그렇듯 소사 아저씨는 옆 동네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급사 언니는 우리 큰언니 동창이었다.

버스 꽁무니에 매달려 매연을 실컷 맡으며 차부까지 가는 것이 바깥 세상과의 유일한 접촉이었으니, 줄을 맞춰 암룡추까지 걸어가는 소풍은 한 해의 가장 기대되는 행사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열 번쯤 가는 곳이었지만, 소풍날이 가까워 오면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늘 용이 되지 못한 '구렁이'의 저주를 기억했다.

공동묘지에 학교 건물을 짓고 뒤쪽 으슥한 곳에 우물을 파는데, 우물터에는 곧 용이 될 구렁이가 살고 있었다 한다. 소사 아저씨가 너무 놀라 삽으로 그 구렁이를 죽여 구렁이는 결국 용으로 승천하지 못했고, 그 한을 우리가 소풍을 갈 때마다 비를 내림으로써 푼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를 우리는 한치의 의심도 없이 굳게 믿고 있었다.

오갈든 낙엽 쌓인 학교 계단, 쓰임새를 다한 철골만 남은 폐교의 의자.
오갈든 낙엽 쌓인 학교 계단, 쓰임새를 다한 철골만 남은 폐교의 의자. ⓒ 이승열
송촌국민학교 시우분교 팻말이 뒹굴고 있다. 오래된 우물은 뚜껑이 덮여 오래 전 그 쓰임새를 잃었다.
송촌국민학교 시우분교 팻말이 뒹굴고 있다. 오래된 우물은 뚜껑이 덮여 오래 전 그 쓰임새를 잃었다. ⓒ 이승열
늘 삽과 빗자루 같은 작업도구를 들고 일하고 있는 아저씨 근처에 접근하여, 그의 신체적 특징을 잡아 놀려대면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묵묵히 일을 하던 분이, 우리가 방심한 틈을 타 버럭 소리를 지르곤 했으니 구렁이의 저주와 아저씨의 무뚝뚝한 이미지는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긴 했었다. 소풍 때 비가 온 기억은 한 번도 없다. 그냥 모두 소풍 때 비가 오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소원을 그렇게 풀었던 것 같다.

5학년 때쯤 오래된 일본식 건물을 허물고 미색의 이층 건물이 산뜻하게 들어서더니 졸업 직전 두레박으로 물을 긷던 우물이 폐쇄되고 그 자리엔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수도꼭지가 열 개쯤 생겼다. 그 뒤 구렁이의 저주에 대한 전설은 생명력을 잃고 사라져 버렸다. 두레박과 우물이 존재할 때만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전설이었다.

이제는 징검다리를 건널 때 폴짝 폴짝 뛸 수가 없다.
이제는 징검다리를 건널 때 폴짝 폴짝 뛸 수가 없다. ⓒ 이승열
물가에도 길가에도 온통 가을빛 뿐이다.
물가에도 길가에도 온통 가을빛 뿐이다. ⓒ 이승열
북한강을 따라 수종사 앞으로 이어지는 동네가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이다. 송촌리에서 덕소 월문리로 가는 길 중간에 시우리란 작은 동네가 있다. 수종사가 있는 운길산의 뒷자락쯤 된다. 지금은 확장되어 마주오는 차를 만나도 별 걱정이 없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길은 아주 좁은 오솔길이었다.

중간에 트럭이라도 한 대 만나면 양쪽 운전자가 모두 내려서 길의 상태를 확인하고 비켜줄 만한 공간을 확보하고, 그러고는 진행이 가능했던 아슬아슬한 길이었다. 가슴을 졸이면서도 늘 그 길로 들어서는 것은 카페, 모텔이 뒤덮은 북한강변에서 살짝 벗어났음에도 내 어린 시절 원형을 그대로 갖춘 마을이 있고, 초등학교 분교 건물이 있고, 뚜껑이 덮여 쓰임새를 잃었지만 오래된 우물이 있기 때문이다.

켜켜이 쌓인 산은 결국 한곳에서 만나고, 그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
켜켜이 쌓인 산은 결국 한곳에서 만나고, 그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 ⓒ 이승열
배나무 끝에도 가을이 내려 앉았다. 배나무 단풍이 이토록 고운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
배나무 끝에도 가을이 내려 앉았다. 배나무 단풍이 이토록 고운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 ⓒ 이승열
추수를 끝낸 논에는 벼 낟가리가 쌓여 있고, 개울 곳곳에 징검다리가 놓여 있어 빈 공간에 차를 세우고 어디든 거닐면 가을이 그대로 느껴지는 곳이다. 계절을 견디기 힘에 겨운 듯 만개하지 못한 코스모스가 아직도 피어 있고, 잎을 떨구기 시작한 배나무의 단풍 든 잎이 소복이 쌓여 있는 전형적인 농촌 풍경이 펼쳐져 있는 곳이다.

논 한가운데 그루터기에서는 다시 연두색 새싹이 돋기 시작하고, 켜켜이 겹쳐진 골짜기 사이로 막바지를 향해 치닫는 단풍이 아직도 활활 타고 있다. 사위질빵과 민들레 홀씨가 가을 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비상할 채비를 갖추고, 아주까리는 검게 익고 있다.

송촌초등학교 시우분교장(터)에 이젠 기념석으로만 남아 있는 시우분교.
송촌초등학교 시우분교장(터)에 이젠 기념석으로만 남아 있는 시우분교. ⓒ 이승열
'송촌국민학교 시우분교'. 1966년 12월 6일 개교하여 1992년 2월 29일 폐교될 때까지 23회 동안 267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초등학교였다는 사실을 기념석이 알려줄 뿐이다. 가을이 되면 총동창회 겸 체육대회라 이름 불리는 행사에서 1년에 한 차례씩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묻고 추억을 이야기하는 곳이다.

아직 페인트칠이 다 벗겨지지 않은 철봉, 학교 울타리로 사용되었을 키 큰 전나무만이 이곳이 학교였다고 말해 주고 있다. 그나마 작년까지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던 학교 건물조차 이제는 없어져 버렸다. 건물을 헐고 난 자리에 두 칸 정도 됐을 옹색한 공간이 드러나 있다.

현대식으로 지어진 사택 벽에 '송촌국민학교 시우분교'란 팻말이 기대어 있다. 주인 잃은 문패가 애처롭다. 누군가의 대문에 가져다 걸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 본다. 이미 쓰임새를 다한 둥근 우물에 뚜껑이 견고히 덮여 있고, 그 아래 작은 수도꼭지가 매달린 수돗가가 있다.

사위질빵이 홀씨되어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사위질빵이 홀씨되어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 이승열
코스모스는 옹색하고, 노란빛 감국은 풍성하다.
코스모스는 옹색하고, 노란빛 감국은 풍성하다. ⓒ 이승열
아이들이 앉았던 낡은 의자가 철골만 유지한 채 고추를 말리는 비닐을 고정 시키거나, 운동화를 말리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이미 치러진 총동창회를 겸한 체육대회 행사를 안내하는 현수막이 아직도 걸려 있어, 이곳이 십수 년 전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꽉 찼던 생기 넘치는 공간이었음을 말해준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계단은 온통 낙엽이다. 오갈 들어 바짝 말라 바스러질 것 같은 낙엽이 계단을 가득 채웠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중학교도 1984년을 끝으로 폐교되었다. 우리 언니도, 오빠도, 동생도, 형부도 모두 그 초등학교 출신이다. 1976년 2월 내가 36회 졸업생이었으니 반세기가 넘게 그 자리에 있었던 셈이다.

한 서린 구렁이의 전설을 간직했던 우물과 학교 팻말의 안부가 문득 궁금해진다. 떠남은 늘 과거와의 조우이다. '송촌국민학교 시우분교'의 팻말처럼 오랜 시간 비바람을 맞다가 사라졌을 내 초등학교의 안부가 문득 궁금해진 만추, 나는 오늘도 가을빛 깊은 길 위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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