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향해 비상을 꿈꾸는 각수바위
16번 국도를 벗어나 서귀포 중산간지대에 접어들면 또 다른 세상이 시작된다. 그 곳으로 들어가는 시간은 의외로 짧다. 언제 도시를 빠져 나왔는지 어리둥절할 만도 하다. 아직도 이 도시에 때 묻지 않은 자연문화유산이 보석처럼 웅크리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빼어난 자원이 많아서 아직은 묻혀져 있는 것일까. 이 고장 사람들에게도 각수바위는 물 설은 존재다.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아 찾아가는 것 자체가 두려울 수 있다. 그 만큼 베일에 싸여 있다.
각수바위는 서귀포시 호근동에 있는 오름이다. 영산사 가는 길을 따라 북쪽으로 1km를 들어가면 도시가 완전히 사라진다. 그 대신 눈 앞에 나타난 각수바위가 세상을 향해 날아갈 듯이 위용을 품고 있다. 그 모습이 거침없다. 자연의 캔버스에 덧칠하지 않은 신비가 묻어 있다.
마을사람들은 각수바위를 '학수암'이라 부르기도 했다. 날개를 펴고 날아와 앉아 있는 학의 모습을 닮았다는 것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 웅크린 부부 사자, 양뿔을 치켜든 소의 머리, 날개를 펼친 학, 세상을 지키고 있는 큰바위얼굴 등 그 모습이 천의 얼굴이다.
각수바위를 올라가는 길은 영산사라는 절 옆으로 난 좁은 계곡에서 시작된다. 산행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등산로는 없다. 단지 야생동물의 습성을 좇아 답사객들이 밟고 지나간 흔적을 따라 가면 그만이다.
산길을 더듬는 것 자체가 서투르다. 그래도 시원하게 뚫린 한라산 등산로를 따라 가는 것보다는 느낌부터 다르다. 사람을 위한 산길이 아니라 자연 속에 파묻힌 산길이다. 자연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넉넉한 품에 부담없이 몸을 던질 수야 없지만 자연의 속살에 가끔 손을 대거나 기웃거리며 엿보는 기분 또한 그만이다.
제주 화산활동의 프롤로그, 조면안산암
각수바위는 제주 화산활동의 프롤로그 격이다. 제주도의 화산활동은 적어도 120만 년 전에 시작하여 약 2만5천년 전까지 4단계에 걸쳐 용암을 분출했다. 화산활동이 휴식을 취한 것은 모두 3차례로, 그 기간은 약 10만년 동안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만 년 전후의 서귀포층이 퇴적된 이후 본격적인 화산활동이 이루어지면서 각수바위조면암이 만들어졌다. 연구결과를 종합하면 1단계 화산활동이 이루어진 시기다. 산방산, 범섬, 문섬, 섶섬, 월라봉, 제지기오름 등이 형성된 것도 이 때이다. 그 시기가 언제일까. 학계에서는 약 90만 년~70만 년 전으로 연대를 측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각수바위는 한라산체와 한라산 백록담보다도 훨씬 오래 전에 지구상에 출현한 셈이다.
각수바위의 주제는 화산암이다. 이 곳에서는 제주 전 지역에서 고르게 분포하고 있는 현무암을 볼 수 없다. 차돌처럼 단단한 조면안산암이 대부분이다. 각수바위의 산기슭과 정상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수십만 년에 이르는 영겁의 세월동안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구멍이 숭숭 뚫린 제주 현무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바위군락 앞에서 아무래도 주눅이 들 것이다.
산등성마루를 올라가는 길에는 구실잣밤나무가 푸른 하늘 위로 기지개를 펴고 있다. 족히 15m는 될 것 같다. 참식나무, 참가시나무, 붉가시나무가 울창하다. 인간의 눈높이를 따라 사스레피나무와 모새나무, 돈나무가 눈에 띈다. 좁은 오솔길 주변에는 겨울딸기, 자금우, 백량금이 나름대로 질긴 생명력을 키우고 있다. 족제비고사리, 좀고사리는 언제 만나도 집단성을 뽐내는 녀석들이다.
세상 밖에서 세상을 품고 있네
이미 오름 정상에는 자연의 속살을 비비는 사람들이 먼저 도착해 있다. 넓적한 바위, 수직절벽의 기암이 바위산을 이루고 있다. 서귀포 시가지와 그 앞바다가 가슴 앞에 펼쳐진다. 선계의 중심에 서 있는 듯하다. 학처럼 날고 싶은 욕망이 고개를 내민다. 아! 비상을 꿈꾸어도 괜찮은지 아무나 붙잡고 묻고 싶다.
각수바위에서는 세상 밖으로 떠나 온 느낌이다. 세상 밖에서 세상을 내려다 보는데도 그 어떤 자만을 드러낼 수 없다. 겸허한 자세가 필요한 순간이다. 펑퍼짐한 바위에 걸터앉아 산행의 피로를 녹이지만 긴장되는 것은 험한 산세 때문이리라.
그러나 도시를 벗어나 자연의 일부가 된 사람들에게는 삶의 고달픔을 잠시 잊을 수 있다. 자연을 닮아가려는 아름다운 욕심이 생기는 것도 큰 기쁨이다. 가볍게 만난 뭇사람들에게서 살가운 인연의 끈을 잇는 것도 산에서만 누릴 수 있는 행복이다.
각수바위에도 애틋한 전설이 스며 있다. 먼 옛날 마을에 양반집 3대 독자와 혼인한 젊은 며느리가 몸에 태기가 없어 고민하다가 한라산 중턱인 이 곳 절로 와서 백일 기도를 드리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절의 스님에게 몸을 빼앗겨 아이를 갖게 됐는데, 그 여인은 자신의 잘못과 운명의 기구함을 비관하며 괴로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기약한 백일이 끝나는 날 그 여인은 절 뒤에 있는 바위에 올라 밤새 슬피 울다가 자살하고 말았다.
여인이 죽은 자리에는 이름 모를 바위가 생겼고, 마을 사람들은 죽은 여인의 원통한 넋이 바위로 변한 것이라며 '열녀바위'라 불렀다.
각수바위는 제주도에 몇 안 되는 보기 드문 화산박물관이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손을 대는 것도 곤란하다. 지금 이대로가 좋다. 가볍게 밟고 지나가면서 느끼는 감촉만으로도 축복의 순간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드러누운 바위 위에서 오랜 세월 서 있는 바위를 바라 본다. 자연이 허용한 범위에서 허둥대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춤사위를 생각한다. 지리산을 사랑한 이성부 시인이 이 곳에 있었다면 어떤 영혼을 이야기 했을까. 제주 화산섬의 서곡을 더듬는 동안 늦가을의 해그림자가 벼랑에 와 부딪친다.
외로움은 긴 그림자만 드리울 뿐
삶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
고즈넉한 품성에 뜨거운 핏줄이 돌고
참으로 키가 큰 희망 하늘을 찌른다
저 혼자 서서 가는 길 아름다워라
어둠 속으로 어두움 속으로 솟구치는
바위는 밤새도록 제 몸을 닦아
아침에 빛낼 줄을 안다
외로움으로 드러누워 흐느낌만 들릴 뿐
삶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
슬픔은 이미 기쁨의 첫 보석이다
외로움에서 우리는 살고 싶은 욕망을 일깨우고
눈물에서 우리는 개운한 사랑을 터득한다
산골짜기에 또는 비탈에
누군가의 영혼으로 누운 바위는
금세 일어나서 뚜벅뚜벅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 이성부의 시 '선 바위 드러누운 바위' 전문
덧붙이는 글 | <찾아가는 길>
서귀포시내 16번 국도변을 따라 호근동 영산사 입구까지 간 후 북쪽으로 1km 진입하면 각수바위 오름을 올라가는 영산사 계곡이 있다.
<주변 명소>
엉또폭포, 고근산, 돈내코, 서귀포감귤박물관, 칡오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