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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배하는 로버트 김씨와 부인 장명희씨.
참배하는 로버트 김씨와 부인 장명희씨. ⓒ 이병선
10년만에 자유의 몸으로 고국을 찾은 로버트 김(65·한국명 김채곤)씨는 1996년 백동일 주미대사관 해군 무관에게 북한 관련 정보를 제공할 당시 개인의 신변에 어려움이 있을 것을 알면서도, 이를 각오하고 정보를 주었다고 밝혔다.

로버트 김씨는 7일 전북 익산의 부모님 납골묘를 참배하고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오마이뉴스>와 한 단독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하고 "정보라는 것은 시간에 상당히 민감한 것이기에 필요할 때마다 주게 되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로버트 김씨는 "당시에는 그것이 한국이나 백 대령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 판단했다"면서 "내가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한 일이기에 지금도 후회는 없다"는 조국 사랑의 고백을 재확인했다.

하지만 로버트 김씨는 이후 홀로 법정 투쟁을 하고, 자신의 형량이 무기형까지 거론되면서 "한 때는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다"며 인간적으로 겪어야 했던 극한의 고뇌와 압박감을 회고했다.

그는 "구속 이후 2년 동안 종신형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차라리 무기수로 있으면서 고생을 하느니 내 목숨을 끊고 잊어버리는 것이 가족이나 나를 봐서 편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목숨을 버리려고 한 적이 있다"고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술회했다.

김씨는 그러나 "9년형으로 형량이 확정된 다음에 '나는 무기수가 아니다' '언젠가는 나갈 수 있다'라는 생각에 삶에 대한 의지를 다시 한번 지피게 되었다"고 말했다. 특히 "이후 후원회와 구명위원회가 생기고, 많은 국민들이 내게 용기를 주면서 건강하게 나가야겠다는 일념으로 운동도 열심히 하고, 미래를 설계해 보기도 했다"고 감사를 표했다.

그는 한국이 통일된 후 '로버트 김 사건과 본인이 역사에 어떻게 평가되기를 바라는지'에 대해 "거기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면서 "지금 이 시점에는 그저 평화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고 소회를 밝혔다.

또 앞으로 한미동맹관계가 상호 발전적으로 이어져 나가기 위해서는 "친해지고 서로 신뢰감을 가질 때 돈독해지리라 생각한다"며 "자주 만나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전날 귀국 기자회견에서 바람직한 한미관계란 "평등한 관계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우호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로버트 김씨는 휴전선 부근의 북한군 배치 실태 등 백동일 대령에게 넘겨주었다는 50가지 정보의 구체적인 내용들에 대해서는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얘기할 수 없는 문제들"이라며 여전히 말을 아꼈다.

아울러 자신의 사건이 정치적 구실로 이용되거나 논란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서 "이를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 현명한 정책을 수립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로버트 김씨는 이 밖에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이 나라가 1등 국가가 될 수 있을지를 먼저 생각해 보길 바란다"며 "그것이 젊은이들이 할 수 있는 애국"이라고 강조했다.

김씨는 인터뷰 내내 "국민의 사랑과 격려, 용기와 성원이 없었다면 나와 우리 가족이 이렇게 살아오지 못했을 것"이라며 감사의 인사를 거듭해서 전했다. 그는 "여러분이 보여주신 사랑은 보통 사랑과 다르다"면서 "도와주신 고국의 국민들께 정말 감사드리고, 그 사랑에 보답할 기회가 있으리라 믿는다"라고 말했다.

부인 장명희씨도 "남편의 사건을 자기 일처럼 함께 아파해 주시고, 기억해 주신 국민들의 사랑과 도움이 우리가 이 자리에 설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이 된 것 같다"며 "여러분에게 실망을 끼쳐드리지 않도록 우리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하겠다"고 미소지었다.

"아버지, 어머니 조국에 이제야 오게 됐습니다"
로버트 김, 부모 납골묘 참배하며 회한의 눈물

▲ 로버트 김씨가 방명록에 서명하고 있다.
ⓒ이병선
"아버지, 어머니 그렇게 기다리시던 당신의 아들 채곤이가 이제야 돌아왔습니다..."

6일 귀국한 로버트 김씨가 전북 익산의 원불교 영모원에 모셔진 부모 납골묘를 찾아 참회와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부인 장명희씨와 동생인 김성곤 국회의원(열린우리당), 후원회 회원 등 10여명과 함께 이곳을 찾아 참배하고 "장남으로서 부모님을 한 번도 모셔보지 못해 너무나 서운하다"며 "불효를 용서해 달라"고 눈물지었다.

김씨는 방명록에 "이렇게 부모님을 불러보지만, 대답이 없으시니 너무나 슬프다"며 봉안된 유해에 국화꽃을 헌화했다. 자리를 옮겨 진행된 천도제에서 김씨는 부모의 영정을 번갈아 어루만지며 "조국에 이제야 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늦게 와 죄송합니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씨의 아버지인 고 김상영(전 한국은행 부총재)씨는 큰 아들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뛰다 "채곤이가 한없이 보고 싶다"는 유언을 남긴 채 지난해 2월 경기도의 한 요양원에서 숨을 거두었고, 어머니 황태남씨도 4개월 후 세상을 떠났다.

로버트 김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당시 수감상태였으며, 어머니마저 자신이 가택연금에 들어간 지 나흘만에 눈을 감아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당시 그의 일시귀국을 탄원하는 촉구가 이어졌으나, 미국측이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장례식에 참여할 수 없었다.

로버트 김씨는 다만, "부모님 생전에 꼭 한번이라도 가까이에서 모시고 살고 싶었는데, 이렇게 떠나시니 너무나 슬프고 애석하다"는 내용이 담긴 육성편지를 영전에 드리는 것으로 아들로서의 예를 다해야 했다.

김씨는 이날 "수감 당시 아버지가 휠체어를 타고 면회를 오셔서 건강하게 있다 나오라는 말씀을 주셨는데, '이것이 마지막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가슴 아팠다"고 회고하며 "부모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이 가장 큰 한"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그는 "테니스를 잘 치시던 아버지를 따라 나섰던 기억이 난다"고 추억하며 "만약 살아계신다면 여행을 좋아하시는 부모님께 함께 여행을 가자고 말씀 드렸을 것"이라고 되뇌었다. / 김범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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